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병과는 포병이다.
1945년 9월 21일 북경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 1946년 5월 10일에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귀국한다.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셋째형 독립운동가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순사 출신 구미 경찰관들과 대립하다 사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사건 직후 형의 친구이자 사회주의자이던 이재복의 권유로 반이승만파이던 남로당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심 판결 이후 남조선로동당 조직구도 윤곽을 증언한 뒤 백선엽 육군본부 정보국장과 김안일 방첩과장, 김창룡 방첩대장 세 사람의 보증을 받고 집행정지 조치로 풀려난다. 이후 백선엽 국장의 배려로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 전쟁때 다시 현역 군인으로 복귀한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변란 성격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면서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루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 및 군대 현대화 사업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