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담이 오갔던 사내들의 뜻 모를 죽음과 금수만도 못한 남자와의 혼인으로 얻은 지독한 상처. 칠흑 같은 앞날의 숨 막히는 절망감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먼 곳으로 떠나 홀로 살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 후, 망자(亡者)로 위장하여 한양으로 도망쳐 온 지 1년. 실바람 하나에도 바스러질 듯 위태롭게 살아가던 내 앞에 나의 지아비가 되어 주겠다는 한 남자가 다가왔다. 봄볕 같은 온후한 눈동자로 내 모든 것을 감싸안듯 응시해 오던 그. 너른 그의 품 안에서 다시 한 번 행복을 꿈꾸고 싶었지만 그를 마주할 때마다 뻐근해져 오는 가슴을 가만히 내리누른 것은 나의 이 기구한 삶 속에 차마 그를 들일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하나, 그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마음이 비가 되어 내린 순간 내면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감정은 꽃씨가 되어 바싹 메마른 내 가슴에 살그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온한 그의 그늘 아래서 잠시나마 희망할 수 있었다. 비정한 내 운명도 이 정도의 행복쯤은 눈감아 주리라고……. 이희정의 로맨스 장편 소설 『님아 (恁我)』 제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