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100년 후 재발견된 강렬하고 매혹적인 소설!
죽은 자의 기묘한 귀환, 은밀한 상처를 헤집는 두 개의 비밀스러운 목소리
진지한 인류애에 대한 아름다운 증언,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비추는 불빛
▶ 제목의 물음표는 격한 충격에 사로잡힌 한 인간을 시사한다. 한 생존자가 죽은 이로서 귀환한다. 두 개의 목소리로 어떤 상처에 관해 이야기한다. ─ 센투런 바라타라야
▶ 진정으로 놀라운 환상 속에서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보았던,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비추는 불빛을 발견한다.―레오 그라이너, 《베를린 뵈르센-쿠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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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플람(Peter Flamm)의 소설 『나?(Ich?)』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페터 플람의 본명은 에리히 모스(Erich Mosse)로 1891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데뷔 소설 『나?(Ich?)』를 발표한 이후 몇 해 동안 『너(Du)』, 『죽음을 향한 귀환(Heimfahrt zum Tode)』 등, 세 편의 소설을 더 발표하며 전문의 과정을 밟았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1933년 아내 마리안느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고, 1934년에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정착했다. 그의 환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윌리엄 포크너였다. 그 밖에 뉴욕의 저명인사들, 예컨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찰리 채플린 등이 그의 집에 오갔다고 한다.
1926년 독일의 S. 피셔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어 “열정과 고통의 화산 같은 책, 숨이 멎을 듯, 단숨에 쓰인 빛나는 책”, “진지한 인류애에 대한 아름다운 증언” 등의 찬사 속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그의 첫 소설 『나?』는 약 한 세기가 흐른 2023년 한스 팔라다, 에리히 캐스트너,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등에 비견되며 새롭게 복간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심리 스릴러의 고전적 문제를 던지며 전개되는 『나?』는 독특한 도플갱어 모티프를 가진 소설이다. 전통적인 도플갱어 소설들이 극단적으로 상반된 요소들의 길항을 한 인간 속에서 그려왔다면 이 소설에서는 완전히 다른 두 인간의 의식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발화한다. 한 남자의 정체를 밝혀 가는 이 음산한 심리 드라마 안에 담긴 것은 참혹한 전쟁이 앗아 간 것들에 대한 차가운 증언이며, 동시에 한순간 삶의 의미와 존엄을 빼앗긴 인간의 슬픔에 대한 뜨거운 독백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한국에는 처음 번역 소개되는 『나?』에는 작품의 배경과 독특한 형식의 이해를 위한 페터 플람의 강연록 「회고」와 비평가 센투런 바라타라야의 서평 「그래, 나도 들었어, 나도 들었어」가 함께 실려 있다.
■ S. 피셔 출판사의 아카이브에서 100년 만에 재발굴된 문제작
페터 플람(Peter Flamm)―본명 에리히 모스(Erich Mosse)―의 첫 소설 『나?』는 1926년 S. 피셔 출판사에서 발간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비추는 불빛”, “우리의 고통에 대한 끔찍한 비유이자 윤리적인 경고의 외침”, “진정한 시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의 뜨거운 힘” 등의 찬사 속에 강렬하고 생생한 의식의 흐름, 광기어린 속도로 내달리는 문장으로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알렸다.
『나?』는 재판장 앞에서 쏟아내는 단 한 번의 진술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진술은 단 한 장의 단절도, 단 한 줄의 공백도 두지 않은 채 대단히 빠른 호흡으로 흐른다. 전쟁에서 가까스로 생환한 한 사람의 독백인가 하면 전쟁에서 스러진 또 다른 사람의 속죄와 자백이 불쑥 등장한다. 두 영혼은 각각 타자의 삶을 살아내고, 타자의 죽음을 감당하며 하나의 입으로 두 삶의 뼈저린 슬픔을 발화한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나’는 자신의 무덤에 누워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영혼을 심판할 재판관에게 토로하는 최후 변론처럼 들린다. ‘나’는 죽었다, 아니 어쩌면 살아 있다. 전쟁에 의해 무언가 뒤바뀐 남자. ‘나’는 전사한 전우의 웃옷에서 여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취한다. ‘나’는 부유한 의사 한스 슈테른인가? 가난한 제빵사 빌헬름 베투흐인가?
“지금 나는 그 다른 이이고, 그의 죽음을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가 저 바깥 진흙 속에, 땅 밑에 누워 있는 동안 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그의 삶 속으로 들어섭니다, 마치 어떤 액자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러나 나는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뒤에 한 명의 관객처럼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이이자 나 자신인 나를, 그의 형상 뒤에 있는 한 인간을 응시합니다.” (27쪽)
‘나’의 의식 속에 그 둘은 뒤섞여 있다. 만약 ‘나’가 빌헬름이라면 그는 한스의 몸을 발견하고, 그의 여권을 훔치고, 한스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기차의 일등석을 타고 귀향한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 그레테가 눈물을 흘리며 맞아 준다. ‘나’의 생환을 반기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나’를 기다렸던 환자들이 진료를 독촉한다. 친구를 자처하는 스벤은 만남을 재촉하고, 불륜 상대였던 부쉬는 밀회부터 제안한다. 한스가 키우던 개 네로는 ‘나’를 경계하지만 ‘나’는 외과의사 한스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민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곳곳에서 외과의사 한스의 의식이 사라지고 제빵사 빌헬름의 의식이 스쳐 가기도 한다. ‘나’는 빌헬름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집을 눈앞에 본 듯이 그린다. 스스로 의심에 휩싸인 채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어느 살인 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에 법의학자로 불려 나간다. 자신의 고용주를 살해한 혐의로 한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빌헬름의 여동생 에마다. 한스의 아내 그레테를 사랑한 스벤이 한스를 궁지에 빠뜨릴 의도로 난해한 사건의 심리에 부른 것이다. 에마는 고용주가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그 순간 한 마리 개가 나타나 자신을 구하고 남자를 물어 죽였다고 진술한다. 이제 ‘나’의 증언은 그녀를 구원할 수도, 혹은 살인자로 영원히 낙인 찍을 수도 있다. ‘나’는 현장의 증거들에서 읽히는 대로 에마의 유죄를 증언하려 하는데, 그 순간 ‘나’의 입에서는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말들이 불쑥 튀어나오고, ‘나’의 앞길은 헤어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1959년 페터 플람은 25년 만에 돌아온 고국 독일에서 청중 앞에 섰다. 그 강연에서 플람은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어둡게 들끓고 있는 유령 같은 환영과 싸워야 할, 축복받은―혹은 저주받은―운명”이며 그 끊임없는 싸움을 등재하는 것이 작가의 운명임을 강조한다. 외부 세계를 평결하고, 고발하는 일보다 내면의 진동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일에 더 몰두할 것임을 선언한다. 손을 맞잡고 살아가기에는 전쟁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간 과거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그것을 계속 짊어지고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기억의 폐기물 더미를 헤집어 본다면, 그의 의식에 흐르게 될 빛바랜 추억의 영상에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형이 가장 먼저 등장할 것임을 인정한다. 가망 없는 정찰 임무에 제일 먼저 나섰다가 전사한 형에 대한 기억은 그의 첫 소설 『나?』에도 어른거린다.
한스 팔라다(Hans Fallada),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ästner),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등, 전간기(戰間期, 1차 세계 대전 종결과 2차 세계 대전 발발 사이) 문학의 여러 대표작과도 연관 지을 수 있는 『나?』는 전쟁이라는 극단적 비극이 인간의 정체성에 남긴 상흔을 탐구한 비범한 심리소설로서, 1차 세계 대전 중 베르됭 전투에서 스러진 두 사람의 의식이 하나의 몸에서 교차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한스로 귀환했으나 한스의 삶에 생경함을 느끼는 빌헬름의 의식, 빌헬름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재회하는 순간 그들의 비루한 삶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는 한스의 의식, 아내에 대한 사랑을 거듭 확인하면서도 아내를 의심하고 연적을 질투하고 스스로의 불륜에 혐오감을 느끼는 한스의 의식,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처절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빌헬름의 의식. 무수한 쉼표로 이어지고 있는 그 의식의 연결과 단절 속에서 페터 플람은 ‘나’는 무엇인가, 극단적 경험을 겪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현실적인 주제다. 정체성 해체를 다루며 인간 내면의 소용돌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나?』는 인간의 의식을 집요하게 탐사하는 매우 강렬하고 시적인 사유와 문장으로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 있다.
페터 플람 Peter Flamm
본명은 에리히 모스(Erich Mosse)다. 1891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의과 대학생 시절부터 삼촌 루돌프 모스가 발행하는 신문에 칼럼과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데뷔 소설 『나?(Ich?)』는 1926년 S. 피셔출판사에서 발간되었을 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몇 해 동안 『너(Du)』, 『죽음을 향한 귀환(Heimfahrt zum Tode)』 등, 세 편의 소설을 더 발표하며 전문의 과정을 밟았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1933년 아내 마리안느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고, 1934년에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정착했다. 그의 환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윌리엄 포크너였다. 그 밖에 뉴욕의 저명인사들, 예컨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찰리 채플린 등이 그의 집에 오갔다. 1963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195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PEN 주최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그는 이십오 년만에 돌아온 고국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은 나의 세계입니다. 나는 나의 친구들, 그리고 적들과 함께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이 여기 왔습니다.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거지요. 그리고 나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 냈습니다. 나는 ‘무언가를 하거나 죽거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삶을. 이 새로운 언어의 명징한 충만함이 이제 나의 언어이고 나의 새로운 풍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