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버스, 입양, 영국, 닉, 닉, 닉. 화재로 날아가 버린 일곱 살 이전의 기억 이후 진을 붙잡아 준 것은 닉 웨즐리였고 그때부터 그는 그녀 인생의 전부였다. 한국인 입양아가 감히 후작님을 차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를 잃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차지해야 했다. 열여덟 살부터 시작된 그 전쟁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그녀가 살아 있는 한 계속될 터였다. ― 사랑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여전히 소중한 그 사람. 내가 그의 첫사랑이 되고 싶네 젖은 바지에서 다리를 빼내는 그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약간 잠긴 목소리가 작게 물어 왔다. 아닌 척하며 완벽히 속여 넘기기에 진은 자신에 관한 한 무척이나 눈치가 빠른 편이니, 그냥 우기는 수밖에. “글쎄. 요즘 즐겨 듣는 노래야?” ― 그 사람이 단순한 애인이 아닌 나의 영원한 반려가 되어 줬으면 신랄하게 비틀어지려는 입가에 힘을 주어야 했다. “응, 한 백만 번쯤 들은 것 같은데― 싫으면 끌까?” 이후 가수가 누구니, 이 가수가 제일 나으니 어쩌니 하는 진의 말보다 흐느끼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사가 더 크게 들려왔다. ― 그는 내 마음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 그에게 전해 주세요, 조금이라도 더 일찍 와 달라고 구질구질한 사랑 타령일 뿐인데 기분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 구질구질해서 그런지도. “아니. 네가 듣고 싶으면 들어. 그저 옷이 잘 안 벗겨져서 그래. 비가 지겨워. 나중에 프랑스나 미국에 가서 살 거야.” 둘러대느라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오히려 진의 얼굴색을 변하게 만들었다. 뒤늦게야 그것을 깨달은 닉은 벽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그가 기숙사에 가는 것조차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알면서 그딴 소리를 하다니. 그래서 진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두려움이 짙게 드러난 얼굴을 급히 부여잡고 입술을 밀어붙이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런 곳에 가게 되면 당연히 널 데려갈 거라는 말을. 그러고 싶다는 말을. ―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 나의 반려가 될 그 사람을 입 안까지 얼어붙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는 진 때문에, 그리고 구질구질한 가사가 가슴속 어딘가를 피가 나도록 긁는 것만 같아서 결국 닉은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그냥 해 본 말이야.” 그 말에 여전히 불안해하는 눈가가 천천히 접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안도한 건 아니었다. 눈을 내리깔아 표정을 숨기는 것이지. 가슴의 긁힌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오후에는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데,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지금 아니면 언제 볼지 모른다고.” 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흔들자, 습기를 머금어 군데군데 뭉친 앞머리가 이마에서 흔들거렸다. 그래도 시선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그 눈가가 대번에 동그래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두 손을 담요 아래로 넣어, 가는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제가 주시하고 있던 눈가에 의아함이 담기기도 전에 두 다리를 옆으로 벌림과 동시에 담요 아래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두터운 담요 속이라 거의 빛이 스며들진 않았지만, 원하는 목표물을 찾기에는 충분했다. 단숨에 팬티를 옆으로 밀어 내고 입을 크게 벌려 달콤한 곳을 머금었다. 그러자 작은 몸에 경련이 스쳐 가며 기대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안……! 흐으…… 하……!” 그가 입을 가져다 댈 때마다 민망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늘 이런 반응이었다. 처음 자신을 유혹할 때 제 남성을 입에 물기까지 한 녀석치고는 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제 말실수가 그대로 묻혀 버렸으니. 여린 피부를 빨아들이고 희롱하는 것에 집중하고는 있지만, 담요에 가려진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미래의 그 ‘나중에’를 향한 씁쓸함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실수가 아닐지도 몰랐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그 ‘나중에’가 되면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깨닫고 있는 것일지도. 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