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에피그람≫에서는 자신이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는 실망감을 테마로 삼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변해서 돌아온 괴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보여 주는 반응에 대한 실망감도 또 하나의 모티프가 되었다. 이 모티프에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따돌림을 당했다는 느낌, 출판된 자신의 전집이 독자들에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모욕감, 그리고 바이마르에서 크리스티아네와의 관계 때문에 부딪히게 되었던 친구 및 지인들의 몰이해와 악의적인 험담을 방어해야 했던 경험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베네치아 에피그람≫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것은 괴테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반응했던 첫 번째 문학적 증언들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 반응했던 괴테의 작품들은 정치적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의 ‘문학적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괴테는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얻게 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혁명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면밀하게 숙고해 보고, 문학과 당시 벌어지는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찰해 보면서, 그 시대의 요구에 적합한 문학적 대답을 실험해 보았던 것이다. 이 실험의 결실은 괴테의 예술관과 1790년대 중반 이후의 창작에 영향을 미쳤고, 그럼으로써 1794년부터 1805년까지 이어지는 실러와의 10년이 넘는 공동 작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는 ‘바이마르 고전주의(die Weimarer Klassik)’의 전성기, 즉 10년간의 고전주의를 이루게 된다.
괴테의 시는 1794년 여름부터 시작되는 실러와의 공동 작업으로 하나의 방점을 찍게 된다. 1795년 스위스 바젤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그 결과로 북부 독일과 남부 독일 그리고 바이마르 공국은 1806년까지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던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지 않았다. 이 평화적 시기가 10년간의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전제 조건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놀랄 만큼 많은 시들이 만들어졌다. 괴테와 실러가 공동 작업을 하던 시기는 괴테의 시 창작에서 절정을 이룬다. 괴테는 1790년대 초반의 혼란기에 경험했던 것들을 슬쩍 넘어가거나 거부하지 않고 시적으로 이탈리아에 연결할 수 있었다. ≪로마 비가≫와 ≪베네치아 에피그람≫이 1795년 실러가 발행하던 잡지 ≪호렌≫과 ≪문예 연감≫에 발표되었고 이 두 잡지는 그 이후 괴테의 시를 발표하는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괴테가 쓴 새로운 시들의 특징은 바로 고대였다. 6각운과 비가의 기본 형태인 2행시는 고전주의 시대에 괴테가 쓴 시들의 기본 형태가 되었다. 독일어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이 고대의 시 형태들은 현시대에 대해 거리를 두려는 작가의 의식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고대의 시 형태는 괴테가 1790년대 중반부터 시대적 사건을 다시 받아들 수 있었던 냉정한 태도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로의 방향 전환이 시의 형태에만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고대의 문학은 괴테의 도전이었다. 즉, 실러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괴테는 ‘최신 작가’로서 그 도전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대와 현대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의식하고 괴테가 쓴 고대 형태의 시들은 모범으로 삼고 있던 고대의 모방이 결코 아니라, 최신 작가로서 고대의 것에서 모범으로 여겨지는 것에 새롭게 도달해 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상이함과 차이에 대한 의식은 괴테가 고대로 방향을 전환하는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고전주의 시들이 성공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문학에 심취해 계속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경향으로 고착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괴테는 계속 구체적으로 고대의 개별 작가나 작품 또는 특정 장르에 집중하게 된다. 그 밖에도 고대의 형태에 맞춘 문학과 예술에 미학적 영역을 넘어서는 특수하고도 광범위한 효력이 주어지게 된다. 이 고전주의 프로그램에는 이런 미학적 노력의 사회적이고도 문화적인 주장도 들어 있다. 또한 고대를 모범으로 삼는 것은 삶의 실제적 의미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