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니츨러가 1887년에 쓰기 시작하여 1892년에 완성한 이 작품에는 여러 문화 비판적 흐름이 용해되어 있다. 인간 의식을 하나로 일치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집합체로 보는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의 인간 이론(Subjekttheorie)과 니체 철학의 흐름을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결합해 1900년대 오스트리아 빈의 데카당적인 시대 분위기와 엮고 있기 때문이다. 빈에서 시작된 현대성의 선두에 있는 동시에 세기 전환기의 심리적·예술적 경향을 지닌 작품이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살펴본 독특한 희곡
이 작품의 주인공 아나톨은 젊고, 재치 있고, 부유하지만 늘 삶을 지겨워하는 인물이다. 그의 유일한 직업과 삶의 목적은 늘 어떤 사랑의 모험에 휘말려 있는 것이다. 아나톨은 세기 전환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문학적 인물로서, 현실 감각이 없는 인간, 거드름을 피우는 인간, 자기만족 후에 자신의 멍청함을 꿰뚫어 보고 다시 자신의 아이러니를 통해 파괴당하는 인간이다. 작품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중심적인 사건은 거의 부각되지 않는 대신, 강박증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와 심리, 독백처럼 떠도는 대사들만이 남는다. 작가인 슈니츨러가 의사이자 정신 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마치 ‘증상’처럼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살펴보는 독특한 희곡이다.
주제와 형식의 쇄신을 통해 풍부하게 표현해 낸 세기말의 분위기
빈(Wien)의 어떤 현대 드라마도 슈니츨러의 첫 작품인 <아나톨>만큼 세기말의 정신적 분위기를 이토록 풍부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이는 테마와 형식의 쇄신을 통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여러 단막극의 느슨한 연결과 더불어 인간의 몰락, 순간의 상승, 일상의 미학화, 현재의 해체와 과거의 우세, 언어의 비투명성과 대화 능력의 상실 등이 그렇다. 슈니츨러는 이미 1892년에 심리학자의 예리함으로 존재의 방향을 상실한 현대 인간의 다양한 위기와 영혼의 고독을 분석해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