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25쪽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몇 달간 계속되더니 심신의 피곤은 이젠 극도에 달하여 정신엔 광증狂症이 생기고, 몸에는 종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 내 눈은 항상 체 쓴 눈이었고, 몸은 마치 독갑이같아 해골만 남았었다. 그렇게 내가 전에 희망하고 소원하던 모든 것보다 오직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 하루만, 아니 그는 바라지 못하더라도 꼭 한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턱 놓고 잠 좀 실컷 자보았으면 당장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다. … 진실로 잠은 보물이요, 귀물이다. 그러한 것을 탈취해 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다시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정의를 발명하여 재삼 숙고하여 볼 때마다 이런 걸작이 없을 듯이 생각했다. -52쪽
조선 사람의 살림살이를 불러 야명조夜明鳥의 살림과 같다고 하고 싶습니다. 인도 설산 히말라야 산중에 야명조라는 새가 있답니다. 이 새는 웬일인지 일평생을 두고 결코 보금자리를 짓는 일이 없답니다. 그리하여 밤이 되면 높은 산 추위는 우모羽毛를 찌르고, 고원지구 넓은 뜰을 넘어드는 찬바람은 늙은 나무 가지를 흔들어, 겨우 부접하여 있는 새들을 쫒아냅니다. 캄캄한 바람과 찌르는 찬 바람에 싸여 갈 길을 방황할 때, 새들은 일제히 ‘밤이 밝거든 보금자리를 짓자夜明造巢’라고 운답니다.
그러한 무섭고 괴로웠던 끔찍한 밤이 다 가고 붉은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비로소 활기와 빛을 얻어 휘황한 우모에 두 날개를 펴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나니, 이 오천 광야에는 예부터 곡물과 곤충이 많이 있으므로, 밤새도록 ‘야명조소’ ‘야명조소’ 하고 울고 있던 새들도 눈앞에 널려 있는 밤나무, 무화과며, 포도 잎새 그늘에 숨어 있는 모충에만 마음이 쏠려, 그만 보금자리 지을 생각은 멀리 잊어버려 두고, 그와 같이 종일 실컷 놀고 마음껏 먹고 나서 설산 산림 중에 돌아와서는, 밤이 되면 또 ‘야명조소’ ‘야명조소’라고 운답니다. 이렇게 하기를 일생을 두고 하다가 죽는답니다. -67쪽
여성을 보통 약자라 하나 결국 강자이며, 여성을 작다 하나 위대한 것은 여성이외다. 행복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있는 것이외다. 가정을 지배하고, 남편을 지배하고, 자식을 지배한 나머지에 사회까지 지배하소서. 최후 승리는 여성에게 있는 것 아닌가.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150쪽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과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162쪽
나혜석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동경 유학생이자 서양화가. 1913년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도쿄사립여자미술학교에 진학, 여성의 삶을 옥죄는 제도와 사회현실에 눈을 뜬다.
‘사람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나혜석은 화가로의 길을 걸으면서 문필활동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관에 도전하고, 3·1운동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여성들에게 세상은 거대한 벽이었다. 식민지 체제, 봉건사상, 남성중심주의라는 억압적 질서는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3·1만세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최린과의 연애사건이 빌미가 되어 나혜석은 35세의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잃고 혼자의 몸이 되어야 했다.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을 발표해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남성이기주의를 고발하는 한편 작가로서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사회의 냉대는 그에게서 자립의 기회는 물론 건강마저 앗아가고 만다. 시대와 화합할 수 없었던 불꽃같은 예술가의 삶은 1948년 무연고 행려병자로서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