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욱

백성욱 1897년 8월 19일(음력) 종로구 연건동에서 출생했다. 만 3세에 아버지를 여읜 데 ?어, 9세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 났다. 정릉 봉국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 13세에 최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전국 주요 사찰의 불교전문강원 에서 8년에 걸쳐 공부하다, 1917년(20세)에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한용운 스님의 명을 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을 인솔하여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했으며, ?후 남대 문과 대한문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대대적인 검문과 체포가 시작되자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운동을 했으며,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했다. 1921년, 24세에 충정공 민영환의 아들 범식ᆞ장식 형제의 지원을 받아 그들과 함께 1년 동안 프랑스 북부 보베에 있 는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공부했다. ?듬해,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던 ? 미륵을 만나 철학과 한스 마?어 교수를 소개받았다. 시험에 통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 여 1923년 가을부터 마?어 교수를 지도교수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박사학위 논문 작성에 매진했고, ?듬해 5월에 초고 완성, 9월에 인준받았다. 1925년 9월, 28세에 귀국하여 신문과 잡지에 시와 논문, 에세? 등을 기고하고, 각종 토론회와 법회에 나서는 등 불교 혁신운동에 참여하다, 1929년(32세) 늦여름, 불교전수학교(구 불교중앙학림) 교수직 등 모든 걸 내려놓고 금강산 에 입산, 장안사 보덕암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수행 중 혜정 손석재 선생의 권유로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 함께 가서 100일 기도 정진했으며, 1930년부터 장안사 안양암에서 1일 1식 하며 ‘대방광불화엄경’ 염송 수행을 시작했다. 안양암 3년 정진 중 얻은 바가 있어, 장안사 지장암에서 손혜정 선생과 함께 근대 최초의 수행공동체 운동을 전개 하며 회중수도會衆修道를 시작했다. 조국 독립을 기도하고, ‘대방광불화엄경’을 염송하면서 7년여 동안 500여 명의 제자를 지도했다. 1938년(41세) 4월, 지장암 수도 중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경남 의령경찰서로 연행, 50 여 일간 취조받다가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하산하게 되었다. ?후 서울 돈암동과 치악산 상원사 동굴에서 정진 수도하다가, 1945년 해방? 되자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를 조직 하고 민중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인연? 있던 ?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했으 며, 1950년(53세) 제4대 내무부장관,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3년 7월, 부산 피난 중 동 국대학교 제2대 총장에 취임했으며, ?후 5ᆞ16 군사정변으로 동국대학교에서 물러나게 된 1961년 7월까지 중구 필 동에 대학교 교사를 건립하고 시설ᆞ학사ᆞ교수 등 다방면에 걸쳐 동국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금강삼매경론》 《화엄경》 ‘인류 문화사’ 등을 강의했으며, 《고려대장경》 영인 작업에 착수, 총 48권의 현대식 영인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1962년, 65세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의 야트막한 산을 개간, ‘백성목장白性牧場’을 경영하면서 《금강경》을 쉽게 강의하고, 인연 있는 후학을 지도했다. 1981년 8월 19일(음력), 출생일과 같은 날, 8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후 학들? 금강경독송회, 청우불교원 금강경독송회, 바른법연구원, 백성욱 박사 교육문화재단, 백성욱연구원, 여시관 如是觀 등을 세워 가르침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