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운드는 이제 시작이니까
이라야 장편소설 『파이트』가 창비청소년문학 135번으로 출간되었다. 선교사인 아빠를 따라 캄보디아에서 자란 열일곱 살 ‘하람’이 격투기 선수라는 꿈을 찾아 낯선 땅 한국으로의 가출을 감행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만 챙기느라 바쁜 아빠, 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엄마 사이에서 외로운 시간들을 견뎌 왔던 하람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과 맞서는 모습이 애틋한 감동을 전한다.
외투 한 벌 없이 혹독한 한국의 추위를 버티는 하람을 이웃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람을 유심히 바라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다정한 마음을 내준다. 그렇게 전해진 마음들이 용기가 되어 하람은 모두가 덮어 두었던 가족의 오랜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섣부른 화해로 갈등을 매듭짓는 대신, 상처를 다독이며 가족의 그늘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 주는 대목에서 작가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하람의 절박한 내면과 어우러져 몰입감 있게 그려지는 격투 경기 장면이 리듬감과 재미를 더한다. 흔들리고 막막한 순간에도 스텝을 멈추지 않는 하람의 꿋꿋한 몸짓이, 외롭고 혼란한 시기를 견디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남는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다.
낯설고 추운 한국에서 마주한 뜻밖의 사람들
각자의 라운드를 치르는 이들을 위한 다정한 환대
세 살 때부터 캄보디아에서 자랐던 하람은 무심하고 매정한 엄마 아빠에게서 벗어나고자 당찬 기세로 약 3,500킬로미터를 날아 낯선 고향 한국을 찾는다. 바짝 긴장한 채 마주한 공항과 기차역은 머릿속으로 돌려 보았던 시뮬레이션과는 달리 무척이나 춥고 황량하다.
맨몸으로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하람에게 뜻밖의 사람들이 손을 내민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이웃 할머니는 자신의 패딩을 건네주고, 체육관 관장은 등록비가 없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하라고 받아 준다. 격투기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무하와 원지는 선뜻 다가와 친구가 되어 준다. ‘재수 없는 오지라퍼’라고 생각했던 동네 경찰 권 경위는 필요할 때마다 하람의 곁을 지켜 준다.
“씩씩한 사람도, 잘 웃는 사람도, 용감한 사람도 모두 한 점씩은 아픈 구석이 있지. 누구나 다. 나만 그런 줄 알고 이만큼 살았는데 어느 구석에서는 다들 그렇게 아프더라고.” (본문 193면)
혼자인 삶에 익숙해지고자 애써 분투해 왔지만 실은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했던 하람은 점차 다른 사람이 건네는 위로의 힘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며, 그 아픔을 통해 오히려 주위에 더 다정한 마음을 건넬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하람에게 세심한 도움을 건네던 무하에게도, 활기차고 다정한 마음을 전해 주던 원지에게도, 기꺼이 하람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준 권 경위에게도, 뭐든 치고 때려야만 견딜 수 있었던 슬픈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내 눈은 늘 이렇게 엄마를 찾는다.
나를 한 번만이라도 봐 줬으면 좋았을 텐데.“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사건을 겪으면서도 하람의 시선 끝에는 늘 엄마가 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방법조차 잊은 듯한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짝사랑은 이제 지쳤으니 그만두자고 매번 마음먹고도, 자꾸만 엄마를 향하는 시선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하람은 엄마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이유를 알게 되고, 엄마 아빠가 피하고 숨기던 아픈 비밀을 용기 내어 찾아낸다.
“엄마랑 친할 수 없고 사랑하는 관계가 아닌 건 아프지만, 엄마가 용서가 안 될 때는 용서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 (...) 용서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엄마 인생이 그렇구나, 안됐네 하고 바라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보려 하지 말고, 매이지 말고. 그건 엄마 인생이니까. 넌 너대로 살아.” (본문 193-194면)
하람은 아빠에게서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고, 두껍게 쌓였던 마음의 벽 틈으로 엄마를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엄마를 용서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 없다는 권 경위의 조언처럼, 『파이트』는 손쉬운 용서나 화해를 말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사과는 하람이 열일곱 평생 견뎠던 고통과 상처를 다독이기에 부족하다는 점을 세심히 짚어 낸다. 대신 하람은 ‘지독히도 모자란 방법으로 버텨 준’ 부모를 그저 갸륵하게 여겨 보기로 마음먹는다.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부모를 바라보게 된 하람은 자기만의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3, 2, 1… 파이트!
내가 품고 싶은 세상을 향해
처음에는 엄마의 시선 끝을 좇다가 찾게 되었던 격투기 선수라는 꿈과 한국이라는 공간은 점차 하람 자신의 고유한 세계가 되어 간다. 주먹이 와도 피하지 않는 하람의 간절한 열망은 용기로 거듭나고, 섣부르기만 하던 펀치에 무게가 실린다. 혼자서 흔들리면서도 단단히 버텼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런 시간들을 알아보고 격려해 준 이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시야를 넓혀 자신이 품고 싶은 세상을 바라보는 하람의 걸음은 더욱 강하고 환하다. 각자의 링 위에서 삶을 버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용기를 건넬 소설이다.
이제는 엄마가 나를 한번 봐 주기를 갈구하지 않는다. 아빠의 바짓가랑이 뒤로 숨을 나이도 지났다. 두 팔 벌려 나를 안아 주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달려가 안기고 싶은 엄마 아빠 품보다 내가 품고 싶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내 갈구는 이제 그 세상을 향해 있다. (본문 196-197면)
▶줄거리
격투기 선수라는 꿈을 품고 십사 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하람에게 한국의 겨울은 춥고 낯설기만 하다. 함께 온 엄마의 시선은 늘 하람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그런 엄마가 미우면서도 하람의 시선은 자꾸만 엄마를 좇는다. 꿈을 이루기 위해 찾아간 체육관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체육관 관장님과 동네 경찰 등 주변 어른들에게서 받아 본 적 없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면서 방어막을 꽁꽁 치고 있던 하람의 마음도 어느새 조금씩 열려 간다. 그러던 중 하람은 뜻밖의 사실과 마주하며 기억에 없던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되는데……. 각자의 라운드를 버티는 우리들을 위한 성장소설.
▶추천사 전문
종합 격투기 선수를 꿈꾸며 3,500킬로미터를 날아온 주인공의 당찬 기세에 도입부터 압도당한다. 그러나 미래를 향해 마냥 돌진하기엔 원 플러스 원처럼 따라온 엄마가 발목을 잡고, 감추어진 비밀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의 삶은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닌 공격과 방어가 난무하는 격투기 장에서 펼쳐지며 때로는 오래 버티는 기술이 필요하다. 버티다 주저앉고 싶을 때 주인공을 일으켜 세운 건 주위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보여 준 다정한 환대다. 동화의 세계에서 벗어난 청소년 독자가 읽어야 할 땀 냄새 나는 소설이다. 오세란(평론가)
▶차례
한국의 겨울 7
낯선 보금자리 19
새로운 라운드 33
방심은 금물 50
계획에 없던 만남 68
찾아오는 사람들 86
엄마의 생일 103
곁에 있는 기분 116
드러나는 비밀 130
울지 마, 제발 143
파이트! 161
상처엔 연고 176
오늘부터 1일 185
에필로그 198
작가의 말 199
▶작가의 말 중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상처를 주고받는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거리가 있을 것 같았고, 위로와 힘을 주는 관계에서는 서로의 마음이 가닿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사람을 어려워하고 마음 터놓기를 두려워하는 개인적인 고민에서 시작된 발상일지 모른다. 한편으로 내가 전달받은 위로의 힘을 나도 누군가에게 전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파이트』의 인물들은 그것을 참 잘 해냈다. 내가 감당하고 있는 고통이 버거울 때 주변에서 건네는 말 한마디,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보여 주었다. 나이나 사회적 위치, 친밀한 정도를 떠나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마음을 나누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앞으로는 나도 하람이, 무하, 원지, 권 경위, 감초 삼촌이 알려 준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 볼 작정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것처럼 또 누군가에게 나도 위로를 전달하고 힘을 줄 수 있다면 더없는 삶의 기쁨이 될 테니까.
▶본문 중에서
킥이 날아오는 순간, ‘어쭈’ 하고 머리를 흔든 게 잘못이다. 그 틈에 상대의 주먹이 내 오른 턱을 날렸다. 홱 돌아간 고개 때문에 내 몸이 비틀렸고 중심을 잡기 위해 뒷걸음치는 사이, 체중을 실은 상대의 강한 킥이 내 허벅지를 강타했다. 퍼억! (7면)
엄마는 지금 무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렇게 우두커니, 아니 멍하니 봐도 좋으니 나를 한 번만이라도 봐 줬으면 좋았을 텐데. (24-25면)
내 눈은 늘 이렇게 엄마를 찾는다. 언제 어디서나 시도 때도 없이.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을 거다. 어쩌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랬는지 모른다. (...)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지쳤다. 이제는 그만둘 거다. 이제는 그러고 싶다. (46-47면)
나는 혼자이고 싶었던 적이 없다. 모두가 날 떠날까 봐, 내게서 멀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늘 엄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다녔다. 교회에 오는 모든 아이에게 웃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고 삐뚤빼뚤 쓴 글씨에도 잘했다고 박수를 보내는 아빠의 뒷모습을 좇았다. (88-89면)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이제껏 내게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그 기분. 나란 존재는 감히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주제넘은 기분을 집에 가는 단 이십 분이라도 누려 보고 싶었다. (123면)
내게도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 필요했다. 그냥 누구든 허수아비처럼 옆에만 있어 줘도 너무 서럽지 않을 것 같았고, 너무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고, 너무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141면)
“씩씩한 사람도, 잘 웃는 사람도, 용감한 사람도 모두 한 점씩은 아픈 구석이 있지. 누구나 다. 나만 그런 줄 알고 이만큼 살았는데 어느 구석에서는 다들 그렇게 아프더라고. 그걸 혼자 감당하느라 끙끙 앓으며 견디는 거였어.” (193면)
“엄마랑 친할 수 없고 사랑하는 관계가 아닌 건 아프지만, 엄마가 용서가 안 될 때는 용서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 (...) 용서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엄마 인생이 그렇구나, 안됐네 하고 바라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보려 하지 말고, 매이지 말고. 그건 엄마 인생이니까. 넌 너대로 살아.” 권 경위는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193-194면)
‘미안하다’라는 말은 묵직하면서도 동시에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 한마디로 퉁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 말 한 번에 아물 수 있는 상처도 아니다. ‘미안하다’는 그 마음, 짐작은 하지만 내 고통에 비해 턱없이 쉽다. 이를 악물고 버틴 내 오기에 비해 어처구니없이 가볍다. (...) 그렇지만 나는 아빠의 이 서툴고 어설픈 논리를 갸륵하게 봐 주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버티려고 한, 지독히도 모자란 방법으로 버텨 준 아빠와 엄마가 가상하니까. (196면)
이제는 엄마가 나를 한번 봐 주기를 갈구하지 않는다. 아빠의 바짓가랑이 뒤로 숨을 나이도 지났다. 두 팔 벌려 나를 안아 주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달려가 안기고 싶은 엄마 아빠 품보다 내가 품고 싶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내 갈구는 이제 그 세상을 향해 있다. (196-197면)
어느새 내 반경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날 봐 주고 웃게 해 주는 사람들.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내게 애정 어린 관심을 툭툭 던져 주는 사람들. 그들 덕분에 하나에 꽂혔던 내 시야가 넓어졌다. 이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그들과 오른 링 위에서 함께 버텨 갈 앞날이 기대된다. (197면)
2012년 『어린이와 문학』에 동화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을 믿기에 이야기 만나는 시간을 즐긴다. 그동안 동화 『올드 보이 선생님』 『미확인 바이러스』 『가짜 정우 진짜 정우』 『수상한 캠프』 『기막힌 효도』를 썼다. 청소년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