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없이 달리며 생의 내력에 대해 생각했다.”
■ 책 소개
“이들이 매 순간 직면하는 진실이 다름 아닌 살아 있음의 증거다.”
우다영 소설가 강력 추천!
사랑과 애도의 절묘한 콘트라스트
한국 문학의 새로운 물결, 이지 첫 소설집 출간
한밤의 소란처럼 생에 유일하게 빛났던
우리의 만남, 우리의 시간에 관하여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와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을 동시 석권하고, 한국일보 당선 당시 “우리 사회의 태피스트리를 배경으로 때로는 희극적이고 감성적인 색조로 그려진 인물들”과 “하루키적 경묘(輕妙)함을 내장한 단편”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대형 신인의 등장을 알렸던 이지 작가의 첫 소설집 《나이트 러닝》이 출간되었다. 수록된 여덟 작품은 오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와 다층적 인물의 묘사를 통해 작가의 개성을 능란하게 구축하고, 키치하고 유머러스한 낭만 서사에 타성적 허무와 페이소스를 핍진하게 녹여냈다.
특히 미발표작이자 표제작인 〈나이트 러닝〉은 모든 언덕이 무덤으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죽은 남편을 향한 그리움으로 자신의 팔을 잘라버린 여자와 그로 인해 도시 전체에 번진 불이라는 독특한 소재가 이목을 사로잡는다. 꿈처럼 황당하고 괴이한 인생의 한순간을 “마법”처럼 끌어당겨 “고유한 삶”으로 표현해내는 작가의 노련함은, 잘라내고 잘라내도 계속 자라는 팔과 그 팔을 주워들고 내달리는 사람들, 밤과 대비되어 환하게 빛나는 불의 이미지 같은 유쾌한 상상의 체험을 제공한다.
《나이트 러닝》의 인물들은 모두 생에 유일하게 빛났던 무언가를 ‘상실’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친구, 가족에서부터 꿈, 젊음, 추억, 낭만으로 다양하게 확장되지만, 소설은 그 상실의 순간들에 침잠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상상하던 미래가 지금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라고 푸념하면서도,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도 웃고, 달린다”라며 쾌활하게 한 걸음 나아간다.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잃어버릴 테지만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결국은 ‘살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의 응결 안에서 《나이트 러닝》이 보여주는 삶의 관성은 곧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된다.
“불이 났어.”
드리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불? 그러고 보니 드리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응. 불이 났다고 활활. 그리고 내가 이걸 주웠어.”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희끄무레한, 핏기없는, 가느다란, 약간은 물컹해 보이는, 길고 가는 물체였다. 소시지인가. 길고 가는 두 개의 소시지.
(…) 절단된 팔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밀려왔다. 눈 앞에 펼쳐진 이걸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얼 믿어야 할까. 드리가 들고 온 건 어디로 보나 마네킹도 소시지도 아닌 진짜 사람의 팔이었다.
“누가 팔을 흘렸나 보네.” _본문에서
“사는 일은 왜 항상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울까.”
꿈, 낭만, 사랑, 삶에 대한 불안과
슬픔을 노래하는 명랑한 애도자들
《나이트 러닝》에는 저마다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는 결핍이 존재한다.
〈얼룩, 주머니, 수염〉의 남자는 빈티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난 신경증을 앓고 있는 여자와 낭만적 연애를 시작하지만 결국 그녀가 선물한 빈티지 밥솥 고장을 발단으로 이별하게 되고, 〈우리가 소멸하는 법〉의 유구와 나는 왕릉을 걸으며 소도시의 지난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던 친구 교호의 죽음을 되새기고, 그들의 삶에 유일하게 빛났던 순간의 점멸을 목도한다. 〈모두에게 다른 중력〉의 나는 사진을 전공했지만, 불시에 찾아온 종양으로 한쪽 눈을 잃고 자기 연민으로 방황하게 되고,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의 미술 입시 학원 강사 해원은 동업자의 배신으로 학원을 정리하고 제자의 집에 얹혀 지내며 제자가 잃어버린 강아지 리치의 행방을 쫓는다.
사랑, 꿈, 낭만, 젊음과 같은, 그들이 일순 놓쳐버린 삶의 추상이 일상적이고 신체적인 결핍으로 구체화될수록 소설을 읽는 우리는 살아가며 한 번쯤 마주하는 종류의 불안에 더욱 깊이 맞닿는다. 그러나 《나이트 러닝》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땅이 곧 누군가의 무덤이라는 괴로운 사실을 잊지 않고”(우다영 소설가) 그 결핍의 길항으로 애도를 택한다. 빈티지 밥솥을 바라보며 ‘알렐루야(할렐루야)’ 읊조리는 남자, 누군가 밟아버린 매미의 사체를 그러모아 묻어주는 유구, 자신의 의안을 피사체 삼아 작업을 해나가는 사진작가, 한 청년의 꿈을 위해 파양 직전의 강아지를 도맡는 해원까지. 그들에게 남겨진 불안의 내력과 그 슬픔에 대처하는 명랑한 애도를 보노라면, 인생의 어떤 부분은 애써 채우기보다는 그저 슬퍼함으로써 버텨내는 것이라는 뭉근한 울림이 뒤따라온다.
“그런데 말이야. 반성과 속죄는 다른 것 같아. 생각해 봐. 반성은 거의 누구나 하는 거야. 반성을 위한 장소도 곳곳에 있지. 반성의 시간을 정해놓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반성을 한다’는 건 살아가는 데 형성된 일정 정도의 습관 같은 거야.” _본문에서
“왜 너는 내가 널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해?”
이 땅의 모든 ‘두 묶음 사람’을 위한
진심보다 진한 무조건적인 선의와 온기의 힘
만약 《나이트 러닝》에 부제가 있다면 그것은 ‘두 묶음 사람’일 것이다. “세상에는 한 묶음 사람이 있고 두 묶음 사람이 있다”라는 〈에덴〉의 문장처럼, 이지 작가의 소설에는 필연적으로 한 쌍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가족, 친구, 연인 등의 묶음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이 서로를 향한 절절한 진심과 끈끈한 애정으로 이루어지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슈슈〉의 주인공은 부모님이 죽고 타국에 있는 이복 언니를 찾아가지만, 늘 따뜻했던 언니한테서 “왜 너는 내가 널 좋아했을 거라 생각”하냐는 말을 듣는다. 〈곰 같은 뱀 같은〉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의 죽음으로 무력감을 느끼던 내가 같은 요양원의 간병인 은유의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하며 꿈같은 위로를 받게 되고, 〈에덴〉에서는 베를린 유학 중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의 위독으로 귀국을 해야 했던 나와 하룻밤의 인연을 찾아 베를린 곳곳을 헤매는 친구 제리가 서로의 ‘홀로 됨’을 이해한다.
《나이트 러닝》은 때로는 그 어떤 진심보다도 곁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와 선의가 더 큰 위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외에 무엇으로 세상을 채울 수 있”을까. 이 책이 품은 무수한 묶음의 사람들을 찬찬히 지나 보내며 자칫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수많은 관계를 돌이켜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끝내, 한밤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숨소리 ‘슈슈’, 다정하고 친절한 동료의 베풂, 부스러기처럼 남은 인연이 밤의 고독과 인생의 고난과 생활의 고달픔을 잊게 해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언니와 둘이 보낸 시간들을 떠올렸다. 언니의 손가락을 잡고 잠들곤 했던 밤들. 진심이 아니었다 해도 따뜻했던 날들. 우리가 타인에게 얻고 싶은 건 어쩌면 진심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 온정이 아닐까.
곯아떨어진 언니는 폭풍 같은 숨소리를 냈다. 슈슈, 푸푸, 퓨퓨 숨소리의 향연. (…)
나는 슈슈, 언니의 숨소리를 들으며 ‘씨발’ 조용히 내뱉었다. 그리고 곧 언니 옆에서 나도 슈슈,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_본문에서
■ 추천사
어떤 순간은 공평하게 펼쳐진 시간을 마법의 중력으로 끌어당겨 고유한 삶으로 만든다. 얼룩말을 얼룩말로, 캥거루를 캥거루로, 새우를 새우로 만들어주며 설사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빈자리를 끊임없이 맴도는 남겨진 이들에 의해 쪼개지고 와해된 흔적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떠난 이의 잔해를 끝끝내 놓지 못하고 소중하게 그러모은 이들이 매 순간 직면하는 진실이 다름 아닌 살아 있음의 증거라는 점이다. 슬픔과 공포로 지쳐버린 몸에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슈슈 살아 있는 자의 숨소리. 눈을 잃은 자리에 의안을 채워 넣으며 그 낯선 이물감 자체에 익숙해지는 일. 잘라내도 무한히 자라나는 팔처럼 징글징글한 생명력은 때론 세상을 모두 태워버리는 불이 되지만,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않고 우왕좌왕 내달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삶은 어김없이 이어진다. 《나이트 러닝》의 소설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애틋한 온정의 시선 끝에 놓인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외에 무엇으로 세상을 채울 수 있냐는 듯이. 소설 속 이들은 저마다 모두 다른 중력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한순간 그들을 그러모을 수 있는 하나의 놀라운 이름을 알고 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땅이 곧 누군가의 무덤이라는 괴로운 사실을 잊지 않는 이들을 애도자라 부를 수밖에. _우다영(소설가)
■ 본문에서
큰 슬픔 앞에서 사사로운 불행은 폼을 잡지 못하는 법이다. 슬픔의 위력은 대단하다. 슬픔은 우리를 발가벗기고 초라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도 웃고, 달리고, 노래한다. 그래야 슬픔의 힘에 눌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일은 왜 항상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울까. 어째서 중간은 없는 걸까. 절단된 팔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밀려왔다. 눈앞에 펼쳐진 이걸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얼 믿어야 할까. 드리가 들고 온 건 어디로 보나 마네킹도 소시지도 아닌 진짜 사람의 팔이었다.
“누가 팔을 흘렸나 보네.”
“봐. 나는 시간과 맞서고 있으니까. 시간아, 네가 아무리 좀먹어 봐라. 내가 꿈쩍이라도 할까. 누가 이기나 보자. 이러고 사는 거야. 정정당당하게 노려보면서. 서두르지 않을 거야. 왜 사람들이 시간을 아까워하는지 모르겠어. 시간은 그냥 여기저기 흘러 다니는 거야. 난 숙제가 없어. 남은 생을 방학이라 생각해.”
“비밀인데, 사실 나…… 삼백 살이야. 네가 아는 것보다 나이가 좀 더 많다고. 시간이 지나면 네 피를 빨아먹을지도 몰라. 그러니 그만 헤어져. 이제 또래 인간 애인을 찾으라고.”
그녀다운 이별 통보였다.
유구는 똑똑했지만 멍청이였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건 무효다. 그럴 시간에 옆에 누워 있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더 사랑에 가까운 것 아닐까. 죽음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용없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 죽거나, 소중하지 않았다 해도 알던 사람이 죽으면 그게 뭔지 저절로 알게 된다.
과거를 되새기는 자신을 발견하며 해원은 생각했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을까. 동업하던 동료를 믿고 모두 맡긴 것? 이전에 몇몇 일자리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아니면 더 오래전 생의 봄날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않은 것? 혹은 제대로 된 구애를 얻어내지 못한 것? 어쨌든 지금 해원에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오십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무계획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젊었다.
“세상에는 한 묶음 사람이 있고 두 묶음 사람이 있어. 한 묶음 사람은 한 사람 자체로 완벽해서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아. 혼자가 더 편한 거지. 모든 결정을, 일상을 혼자 할 수 있는 거야. 오히려 누가 있으면 더 불행할 수도 있어. 완벽한 자신만의 시공간이 필요한 거지. 하지만 우리 같은 두 묶음 사람들은 결코 혼자 지낼 수 없어. 그래서 언제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고, 꼭 맞는 반쪽이 아니라 해도 혼자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에 괴로운 둘을 감수하는 거야.”
■ 차례
나이트 러닝
슈슈
얼룩, 주머니, 수염
우리가 소멸하는 법
모두에게 다른 중력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곰 같은 뱀 같은
에덴―두 묶음 사람
작가의 말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얼룩, 주머니, 수염〉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담배를 든 루스》로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했다. 고양이 토란, 살구와 함께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