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은, 삶보다 더 큰 악몽을 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무도 바쁘게만 그리고 삶을 연장하기 위해서만 애쓰는 이들에게 “난 그쪽 세계의 생존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짊어진, 매일같이 싸고 푸를 삶이라는 생존배낭 안으로 소독제일 수도, 온기일 수도 있는 여덟 가지 이야기를 슬며시 밀어 넣는다. 생존에 있어선 아무 소용없어 보이는 이 소설들은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싱크홀 속에 갇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쿨함과 다정함으로 다가와 그 느닷없음이란 공포로부터 꺼내어준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읽으며 우리는 서로 등과 가슴을 맞대고 함께 걸어가는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목적지가 어디든, 최대한 자유로운 곳으로, 유머러스한 품격을 잃지 않은 채로.
생존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결국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의 소설들은 모두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한 고찰이자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표제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에 ‘생존배낭’이 나와서만은 아니다. ‘살아남는다’라는 건 ‘살아 있다’는 말과도 ‘살아간다’는 말과도 같지 않다. 그 속에는 어떤 뭉클함과 처절함이 있으며, 찌질함과 진심이 있다. 그렇다면 먼저 작가 윤고은은 살아남았을까? “원래 신춘문예로 등단하면 그해에 한두 명만 살아남는다”(〈책상〉)고 하니 어쨌든 작가로서는 살아남은 게 분명하다. 살아남은 작가는, 살아남았기 때문인지 ‘문학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 대신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귀 기울이는 것 같다. 달력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지면이 필요한 ‘일구’와 ‘나’(〈전설적인 존재〉), 책상을 들고 여전히 살아남은 한 남자, ‘기암’(〈책상〉), 제 살던 시대를 통째로 도둑맞은 채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동명동인 ‘박태원’(〈다옥정 7번지〉), 죄책감, 억울함, 배신감으로부터, 오두막에서의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과거의 한 ‘연인’(〈오두막〉), 떼인 돈을 받기 위해 전문가 ‘조’를 찾아가는 ‘부녀’(〈된장이 된〉), 화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작품을 불태워야 하는 화가(〈불타는 작품〉), 생존배낭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지만 결국 회사에서 살아남는 게 더 큰 문제인 ‘나’(〈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불량품인 채 살아가야 하는 ‘Y-ray’와 ‘Y’들은(〈Y-ray〉), 모두 저마다의 생존배낭을 짊어진 채 살아남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윤고은이 바라보는 건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 곁에서 ‘여전히 살아남으려 애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살아남는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는 건 결국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윤고은 소설의 특징이었던 대담한 상상력은 말하는 개 ‘로버트’나(〈불타는 작품〉), 지금 이 시대로 와버린 작가 박태원에서(〈다옥정 7번지〉) 여전히 빛을 발하지만, 우리는 이번 소설집에서 조금 더 핍진해진 윤고은을 만나게 된다. ‘생존’을 바라보는, ‘삶’과 ‘일상’을 꿰뚫는 ‘재기발랄함은 보존된 채로 맛은 점점 깊어지는 오래된 된장’ 같은 그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창문입니다. 쓰레기통이 아닙니다’라는 문장 앞에서, 오두막 안에서 들리는 ‘살려주세요’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잘못 선택했으나 끝까지 읽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윤고은의 말은 그런 고민 앞에 선 우리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한다. 윤고은은 인물들을 지켜보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늙은 차를 얻어 타고 울룰루에 닿을 때까지. 끝까지 닿을 수 있도록 격려하면서.
“누구나 책상 하나의 무게는 다 짊어지고 걸어가는 게 아닐까.”
《무중력 증후군》 작가의 말에서 윤고은은 이렇게 말한다. “활자는 바이러스다. 백신은 없다.” 그랬기에, 우리가 짊어진 생존배낭은, 아웅다웅하며 그 안에 밀어 넣은 물품들은 애초부터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짊어지고, 어떤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쩌면, 경량화에도 표준화에서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 기능은 적은 ‘책상’ 같은 걸 짊어지고 가는 게 “인생이 몇 조각으로 큼직하게 부서지는 순간” 앞에서 결국 우리를 버티게 할지도 모른다. 동생을 업고 쓰러질 때까지 걸었던 ‘마일러’처럼. 마일러는 쓰러진 걸까? 아마, 결코 아닐 것이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통해 윤고은이 보여준 이야기들처럼, 모든 것이 몰살당한 것 같은 밤일지라도, 이야기가 놓여 있는 우리의 사각형 책상 위에는 소독제일 수도, 온기일 수도 있는 햇빛이 모여 있을 것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빛은 아닐지라도, 그 노란 빛과 함께 우리는 조금씩 옆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앞은 아닐지 몰라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살아서 말이다.
윤고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무중력 증후군》, 《밤의 여행자들》,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가 있다. 한겨레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용익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