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세계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우러러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핀다.” 『주역』의 구절에서 드러나듯, 지리는 천문과 더불어 자연학이면서 우주 만물의 원리를 터득하는 기본적인 지식 분야였다. 또한 국가 체제 성립 후 지리학은 국가 경영의 기본 학문으로 중시되었는데, 1789년 정조의 책문(策問)에 답한 정약용의 책문(策文)이 이를 잘 표상한다. 정조가 “곤도가 지세를 만듦에 높고 낮음이 생겨나서 광륜을 알고 오물을 분간하여야 하므로 지리학이 생기게 된 것이다.”라고 지리학의 기원을 말하자, 정약용은 “천하에서 다 연구할 수 없는 것은 지리인 반면에, 천하에서 구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지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지리학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했다. 전통 지리학이 지니는 학문적 중요성은 과학문명사의 관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땅은 인간을 둘러싼 가장 기본적인 환경이기에, 사람들은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켜왔다. 땅(지구)에 대한 관찰과 사유를 거치면서 전통 지리학은 학문적 체계를 갖추었고, 후대 학자들의 다양한 저작들이 나오면서 더욱 성숙되기에 이르렀다. 지상세계에 대한 인식의 역사로서 전통 지리학의 역사는 서양과 다른 독특한 진화 과정을 거쳐왔다. 전통 시대의 지리학은 “왼쪽에는 지도, 오른쪽에는 지리서”라는 뜻의 “좌도우서(左圖右書)”로 압축된다. 지표상의 다양한 사상(事象)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지도이고, 땅의 형상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이 지리서이다. 이 책은 전통의 원칙에 따라 지도학과 지지학을 두 축으로 하여 전통 지리학사 통사를 정리해냈다. 단선적 발전을 전제로 하는 발달사적 시각을 지양하고, 그 시대, 그 지역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신념과 가치 체계, 더 나아가 주변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을 꼼꼼히 짚어내고자 한 점은 이 책의 더없는 미덕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