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마 1

· 도서출판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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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만을 원했다. 그 하나가 소중했고,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잃었을 땐 죽고 싶었고, 죽여 버리고 싶었다. 꼭꼭 숨어 있던 여자를 우연히 만난 날. 얼어붙은 심장에 피가 돌고, 잊고 있던, 가슴으로 사람을 욕망하는 법을 떠올려버렸다. 그랬는데……. 그녀의 비밀을 알아버린 순간 그는 죄인이 되었다. 지켜야 되는데, 이젠 세상으로부터 그들을 지킬 힘과 돈이 있는데, 그의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의 성공에 흠집을 내는 존재는 될 수 없다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이유를 내세우는 당신을 나는 또 어떤 말로 잡아야 할까. 두 번 다시는 심장을 떼어 내고 살 수 없는 나는…… 차라리 나쁜 남자가 되기로 했다. 발췌글 시완이 계산을 할 동안 소희가 입구에서 기다리며 여러 개의 우산이 꽂혀있는 우산꽂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같은 편의점에서 사왔는지, 급조된 우산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어떤 게 시완이 사온 우산일까. “가요.” 그녀의 염려를 비웃듯 시완이 장우산 하나를 뽑아 들고 커피숍 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먼저 귓가를 때렸고, 비 오는 날 특유의 흙먼지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제법 많이 오네.” “소나기는 아닌가 봐요.” 그녀 쪽으로 우산을 받치며 시완이 빗속으로 내려섰다. “아무래도 우산을 하나 더 사야하지 않을까?” “이미 다 팔렸을 거예요. 공원에 있던 사람들이 몇인데. 고시원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까 그냥 가요. 젖지 않게 잘 씌워줄게요.” “네가 젖을까봐 그래. 지금도 절반 이상을 내게 기울이고 있잖아. 너 어깨 젖어.” “그거야 그렇게 멀리 서 있으니 당연하죠. 이러면, 우리 둘 다 안 젖을 거예요.” “어머?” 시완이 그녀의 어깨를 당겨 제 옆으로 바짝 붙여 세웠고, 무방비하게 딸려와 그의 가슴에 코를 박은 꼴이 된 소희가 시완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덴 건 처음이었다. “아, 알았어. 최대한 우산 안쪽으로 붙을 테니까 손 좀…….” “그렇게 꼼지락거리면 나 힘들어요.” “시완아.” 꽉 잠긴 음성에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본 소희는 마주친 눈동자에 오롯이 박힌 자신의 모습에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어깨 한 번 잡힌 것으로 이렇게 바르르 떨면 나 기대할지 몰라요. 이 여자가 나를 남자로 의식하고 있구나 하고.” “……가자.” “좋아해요. 나, 당신이 좋아.” 번쩍, 빛이 반짝인 것은 벼락일까, 어지러운 머릿속 환상일까. “사랑해요.” 우르릉 쾅! 벼락 다음은 천둥이던가. “나는…….” “당신을 갖고 싶어.” 벼락과 천둥은 왜 한꺼번에 오는 걸까. “그만!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마.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네가 입을 떼면 난 그냥 이 비를 맞고 혼자 갈 거야.” 자신을 내려다보는 뜨거운 눈빛을 냉랭히 받으며 소희가 이를 악물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음에도 무시했던 것과, 말로 뱉어진 감정을 쳐내는 것이 같을 수 없었다. 전자는 서로 묵인 하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확실히 밀어내느냐 받아들이느냐의 결정에 따라 그동안의 관계가 비틀릴 수 있었다. 왜, 왜! 이 관계를 벌써부터 파괴해 버리는 거니? 매일매일 걸려오는 네 전화에 외롭지 않았고, 가끔 얼굴을 비치는 너 때문에 위안을 받았는데, 네 고백에 긍정의 답을 할 수 없는 나는 앞으로 어떡하라고! “자, 당신이 쓰고 가.” “하, 당신? 이제 아예 맞먹겠다는 거니?” 깍듯했던 존대가 사라지니 정말 남자와 여자만이 남았다. 그녀에게 떠맡기듯 우산을 쥐어준 시완이 빗속으로 걸어 나가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 소희야, 라고 부를까? 나야 상관없지만, 부모님이나 누나가 아는 걸 당신은 싫어하잖아. 그래서 참으려고 했어. 그 오랜 시간을 참았는데, 겨우 몇 개월 그걸 못 참을까봐? 그랬는데, 밀어내기만 하는 당신이 내 손길에 떨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이미 내 안에서 당신은 흘러넘치다 못해 내 전부를 잠식해가고 있는데!” “너 뭐하는 거야! 다 젖잖아!” “이깟 비 좀 맞는 게 뭐 어떻다고? 신경이 쓰이긴 해?”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 몰라?” “그놈의 수험생 타령 좀 그만 할 수 없어? 내가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당신에게 정신이 팔려 공부 소홀히 했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를 질책하는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는 당신이, 나 때문에 또 다시 자신을 땅에 묻는 삽질을 할까봐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책만 팠어.” “시, 시완아. 이러지 마. 내게 이러지 마, 제발.” 그의 옷이 젖어갈수록 그녀의 애가 탔다. 소희는 우산을 높이 들어 그에게 받쳐주며 이미 젖어버린 팔을 잡아당겼다. “애원의 방향이 틀렸어. 내가 애원할게. 제발 나 좀 봐줘.” “최시완!” “당신은 자기가 불리할 때만 그렇게 내 이름을 불러. 큭, 그걸 알면서도 주책없이 엇박자를 내는 이놈의 심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응?” 우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잡은 시완이 시선을 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다른 손으로 소희의 어깨까지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지나는 행인들이 연인들의 말다툼인줄 알고 힐끗힐끗 두 사람을 살피며 지나쳐갔다. 그녀가 여전히 시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피곤해.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 지금은 그냥 집에 가서 자고 싶어 시완아.” 정말 피곤하고 지쳤다. 돌림노래처럼 돌고 도는 말에 당장 답을 할 수도 없었다. “하아, 결국은 또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거군요. 가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미안해.” “알면 나 좀 밀어내지 마요.” 조금 진정이 된 것일까. 반말이 어느덧 존대로 다시 돌아왔다. 소희는 잡고 있던 시완의 팔을 놓고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다시 시완에게로 옮겨간 우산이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너무 내 쪽으로 기울이지 마. 네 말처럼 난 내 탓을 잘해서 네가 감기라도 걸리면 날 용서할 수 없을 거야.” “고집쟁이.” 겁쟁이에 고집쟁이, 그러고 보니 시완에게 참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인 모양이었다. “너만 할까.” “응. 나 고집 세니까 포기시키려고 하지 마요.” “…….”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고시원 앞에 도착했다. 이미 바짓단이 젖고 신발에까지 물이 스며들기 일보 직전, 고시원 건물 턱에 올라 비를 피하며 소희가 시완을 바라봤다. “조심해서 가.” “화났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어린 남자의 좌절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알까. 자신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소희가 충동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건물 턱에 올라선 덕분에 두 사람의 눈높이가 비슷한 상황, 그녀의 손이 시완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올려주었다. “아니. 빨리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씻고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자. 감기 걸리면 혼날 줄 알아.” “들어가요.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제 머리카락을 만져주던 그녀의 손을 허공에서 잡아챈 시완이 말과는 달리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놔줘야 들어가지.”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딱 방에 들어가서 쉬란 소리예요. 알죠?” 자신을 피해 도망치지 말라는 말이었다. 대답 없이 소희가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무슨 일 있으면 누구보다 내게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요. 알았죠?” 시완이 끝까지 소희에게서 다짐을 받고서야 아쉽다는 듯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고시원으로 들어가 모습이 보이지 않고서야 발을 움직였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던 빗줄기가 한여름의 더위가 무색하게 냉기를 몰고 왔다.

About the author

강렬한 심장의 울림. 너라서……. 너이기 때문에……. 운명 같은 사랑을 꿈꾸는 여자. 상처 주고, 상처 받아도, 결국 사랑을 쟁취하는 주인공들과 함께 나날이 성숙한 사랑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출간작품 달콤한 올가미 또 다시, 사랑 오다. 심장을 채우다 갖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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