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개정판)

· 창비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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ספר דיגיטל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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מידע על הספר הדיגיטלי הזה

“내 새끼, 그래 한시상 재미났는가?”

경탄과 환희를 부르는 짜릿하고도 극적인 순간

 

오래도록 기억될 정지아 문학의 거대한 뿌리

저마다의 그리움을 되살려내는 묵직한 이야기의 힘

 

* 창비에서는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새로이 단장한 ‘리마스터판’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 잡은 작품들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형 베스트셀러의 입지를 확고히 할 만큼 폭발적인 독자의 호응을 얻음과 동시에 문화 각계의 호평을 얻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작가 정지아의 초기작 『봄빛』이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작가 스스로 밝히듯 『봄빛』 곳곳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씨앗이 던져져 있다(「새로 쓴 작가의 말」). 어떤 대목은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등장인물의 감춰진 에피소드로 읽히고, 어떤 대목은 새로운 관점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더 깊이 이해시켜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봄빛』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봄빛』은 그 자체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소설집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봄빛」을 읽고 정지아에 대한 확신과도 같은 신뢰를 갖게 됐다. (…) 세간의 잔재주들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기품에 도달”(『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298면)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이 소설집은 잘 짜인 서사가 선사하는 묵직한 문학적 울림으로 가득하며, 한편 한편에서 짜릿하고도 극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소설집이 천착하는 주제인 ‘잃어버린 기억’ ‘가족의 의미’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 등은 여전히 유의미할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소설집이 처음 발표될 당시(2008)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새롭게 선보이는 『봄빛』의 이야기가 여전히 감동적인 동시에 재미있는 것도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과 과거

삶을 복원해내는 서사의 힘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포용하며 웅숭깊은 세계를 지향했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2006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풍경」의 주인공은 평생 홀로 노모를 모시고 사는 예순의 노인이다. “해가 뜨면 새로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듯” 육십년을 살았다. “어머니였고 세상이었으며 유일한 동무”(93면)였던 어머니는 벌써 삼십년 전부터 기억을 잃기 시작해 막내아들인 자신을 여수 14연대를 따라 떠난 형들로 착각한다. 집 떠난 자식들을 기다리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어머니는 집을 찾는 누구라도 자식인 듯 대한다. 어머니에게 잃어버린 기억이란 평생 동안 기다린 자식들이기도 하고 한 많고 곡절 많은 자신의 젊음이자 한평생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펼쳐지는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는 환상적임과 동시에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못」의 주인공 건우씨는 여든을 넘긴 작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성치 못한 몸을 갖고 있고 매년 봄 자운영이 필 무렵 찾아오는 시집간 누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세이다. 작은어머니는 평생 조카 뒷바라지에 고생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건우씨가 차곡차곡 모은 돈을 호시탐탐 노리지만 건우씨는 그 돈이나마 꼭 간직하고 있으라는 누이의 말을 되새기며 작은어머니와 티격태격한다. 봄이 와도 집에 오지 않는 누이를 원망하는 건우씨와, 그런 건우씨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작은어머니는 함께 늙어가는 서로의 처지를 안쓰러워하며 연민의 감정을 품는다. 아릿한 마음과 동시에 펼쳐지는 시트콤과 같은 상황극들이 웃음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표제작 「봄빛」에서는 젊은 시절 서슬이 퍼렇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듯하다는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전화에 아들이 시골을 찾는다. 밥상머리에서 ‘뚜부’(두부) 반찬을 내놓으라고 막무가내 호통을 치는 아버지와 평생 큰소리 한번 못 냈지만 남편의 보살핌 속에 살아온 어머니의 변한 모습을 보고 아들은 두려울 만큼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음 날 검사 결과를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뇌에 문제가 있다며 아버지는 치매 초기 진단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에 노부모가 나란히 자동차 뒷자리에서 잠든 모습을 보며 아들은 그동안 부모에게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할 때가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 잃어버린 기억은 자식들을 키우고 평생을 살아내야 했던 아버지의 역사이다. 「봄빛」이 주는 큰 감동을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생생한 사투리 생활어 표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추천사). “‘뚜부’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이는 서글픈 설전은 오랫동안 기억될 명장면”(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298면)이다.

「세월」에 이르러서는 치매와 노화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우리 역사의 질곡으로까지 맞물려 확장된다. 빨치산이던 남편을 따라 산에 오르고, 첫아이를 눈물로 보내고, 평생 남편을 하늘같이 믿고 따라온 아낙이 기억을 잃은 남편 옆에서 그동안 말하지 못한 속내를 넋두리로 늘어놓는다. 이 대목에서 「세월」의 화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어머니’이고 ‘이녁’은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녁이 화자에게 글공부를 시켜준 에피소드나, 옥살이를 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재미로 다가온다. 이 작품에서 남편이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고 되새기는 일이란 곧 역사의 복원이고 증언이 된다. 작품 전체에 걸쳐 넋두리를 읊는 아낙은 시종 진한 남도 사투리를 구사하여 살아 있는 입말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섬세하게 포착한 인간의 내면

정지아가 그려낸 다양한 마음의 형태

 

한 많은 평생의 기억을 잃고 자신의 존재조차 잊는 노년의 애틋한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 외에도, 『봄빛』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인생과 인연의 여러 국면을 다채롭게 그려낸 작품들로 읽는 재미가 풍성하다.

어린 시절부터 어둡기만 한 가족사의 운명을 온몸으로 겪었기에 운명처럼 반복되는 인연을 거부하고자 하지만 끝내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그린 「운명」의 ‘나’는 운명 앞에서 “어디 한번 덤벼봐라,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고분고분 져주지는 않겠다”(223면)라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인다. 대학시절 우연한 만남을 거듭한 K는 ‘나’가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하고 다가오지만 ‘나’는 비극적인 운명의 과거로 인해 마음을 열지 못한 채 떠난다. 치근덕대며 접근하는 직장 상사를 피해 떠난 부산행 여행길에서 ‘나’는 운명이라 믿었던 것들의 무상함과 삶뿐 아니라 죽음조차 운명이라는 생각에 잠긴다.

「양갱」의 주인공은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살고 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고모가 반갑지 않지만, 고모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식들 못지않게 각별히 조카를 챙기던 분이었기에 마냥 야박하게 굴 수도 없다. 불쑥 찾아온 조카집에서 자기 집인 양 천연덕스럽게 구는 고모는 주인공이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는 양갱을 만들어주며 가슴에 응어리진 남편과의 이별과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그리고 연작 「길 1」「길 2」에서는 우연히 산행길에서 만난 한날한시에 태어난 동명이인인 주인공 ‘김기영’을 중심으로 길을 떠난 자와 남아 있는 자의 입장을 엇갈리게 그려냈다. 피란길에 엄마를 잃고 동생들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길 1」의 주인공 김기영은 양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아 의대를 졸업하고 제법 성공한 길을 걷지만 동생들을 지켜내지 못한 어린 시절의 자신을 탓하며 가족을 떠나 정처없이 걷는 길 위의 삶을 택한다. 「길 2」의 주인공 김기영은 어린 시절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 타지로 떠나는 동네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향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인물이다.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한 큰딸에 대한 부채의식을 지고 사는 김기영은 친정집에 다니러 오는 큰딸을 위해 산으로 더덕을 캐러 들어갔다가 산길을 헤치고 오는 또다른 김기영을 만난다. 길을 떠나온 자와, 남아서 길을 지키는 자의 조우는 인연과 이별이라는 인생의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실감케 한다.

그밖에 남편과 가족을 떠나 감행한 영국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스무살 차이나는 영인을 통해 마흔셋 여자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하는 「스물셋, 마흔셋」은 시종 유쾌한 필치로 그려지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작가의 “여성성 탐구가 어떤 차원으로 옮아가고 있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해설, 김경수) 작품이다. 여성으로서 자신을 한번도 돌본 적도 사랑한 적도 없음을 자각한 화자의 반성은, 이윽고 독자에게로 옮아가 스스로를 돌본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가벼운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기에 『봄빛』의 묵직함은 오히려 신선한 문학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봄빛』이 지닌 향토성은 시간이 지나도 촌스러워지지 않는 고궁과 같은 매력을 뿜어내며, 보편적인 감수성을 자극해 저마다의 그리움을 되살려낸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움직이게 된다. 문득 부모님의 안부를 묻게 되고, 그리운 사람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혹은 자기를 위해 하루쯤 근사한 ‘호캉스’를 계획하게 될지도 모른다. 『봄빛』에는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살펴보고 아껴주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이야기가 주는 힘일 것이다.

 

 

책 속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세상천지에 그득 고여 있었다. 걸을수록 짙어진 농밀한 달빛은 한움큼 손으로 움켜쥘 수도 있을 듯했다. 쌓이자마자 녹기 시작하는 이른 봄의 폭설처럼 달빛이 그의 발을 쑥쑥 잡아당겼다. 그 서늘한 촉감에 진저리를 치며 건우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푸르스름한 여명의 빛이 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작은집에 맡겨진 이래 육십년을 한결같이 그는 달빛에 발목이 붙들린 채 눈을 떴다. 누이가 새벽 단잠에 취한 그의 몸을 흔들었던 바로 그날 새벽의 달빛이 그러했다.

―「못」, 8면

 

아버지와 어떤 세월을 보냈든 그는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품 안에서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했다. 먼 여행을 할 때마다 어린 그가 부모님의 품에 안겨 칭얼대며 잠들었듯 어머니는, 아버지는 그의 차에서 여행의 피로를 못 이겨 잠들어 있었다. 그들이 그의 생명을 키워냈듯 이제는 그가 그들을 품어 그들이 세월에 빚진 생명을 온전히 놓고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정한 생명의 법칙이었다.

―「봄빛」, 62~63면

 

내 새끼, 그래 한시상 재미났는가?

그의 귀에 와닿은 것은 분명 어머니의 음성이었는데, 순간 놀랄 시간도 없이 묵은 기억 하나가 기억의 어두운 심해에서 전기뱀장어처럼 하얀 불빛을 반짝이며 의식의 표면으로 꿈틀꿈틀 솟아나왔다.

어매, 나가 왜 세상에 나왔는 중 안가?

바삭바삭, 경쾌한 소리가 좋아 멍석에 깔린 콩대 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던 그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멍석 한편에서 콩대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낭자한 머리에 허옇게 먼지를 뒤집어쓴 어머니는 일손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나왔는디?

어매 배 속에 있는디 되게 심심허잖애. 시상에 나가먼 먼 재밌는 일이 있능가 글고 얼릉 나와부렀제.

아직 젊었던 어머니는 땡볕에 까맣게 그을긴 했으나 지금과 달리 윤기 흐르는 얼굴 가득 웃음을 피워올리며 물었다.

내 새끼,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재미난가?

이.

―「풍경」, 92~93면

 

보급투쟁을 성공리에 마치고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오락회가 열렸다. 흥이 무르익어갈 무렵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온 그는 풀대궁을 뽑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세상에서 뭐가 제일 좋으냐는 이현상의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꽃이 제일 좋그만이라. 꽃이라 …… 피어 있을 때야 좋지만 질 때는 허망하지 않소? 사내자식이 좋아한다는 게 고작 꽃이라고 비웃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그는 시상 사는 게 다 그러니께요, 꽃도 사램도 짐승도 어차피 다 죽을 목심이잖애라, 꽃이 지는 걸 보믄 워짠지 맴이 짠허고, 글다보믄 나도 짠허고 넘도 짠허고, 글그마요, 이현상의 질문에 더 한심한 대답을 주절대고 말았다.

―「순정」, 142~43면

 

“나가주세요.”

주인의 허락도 없이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여자에게 내 딴에는 목청을 높인다고 높였지만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바람에 공포에 질린 도둑고양이의 새된 비명 같은 소리가 났고, 순간 여자의 얼굴근육이 부드럽게 펴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여자가 내 영역을 휘젓기 전에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당신이 원하는 걸 다 줄 테니까 빨리 나가요.”

왼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여자는 …… 웃었다.

“참 이상한 부부네. 이렇게 쉬운 걸 왜 웅현씨는 일년씩 말도 못하고 끙끙거렸나 몰라.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양갱」, 162면

 

길은 어디에나 있다. 사람이 쉬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험준한 산에도, 보잘것없어 누가 오를까 싶은 시시한 산에도, 버려진 들판에도, 허물어진 폐가 언저리에도. 언젠가부터 김은 길에 끌렸다. 아니 길이 김을 이끌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김이 길과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근 십년 전, 몽골에서였다. 길과 처음으로 대면했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의 기억이 생성되기도 전부터 길은 있었을 것이고, 마을 고샅길부터 서울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기까지 지난 칠십여년 동안 그는 숱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밟고 걷는 길을 의식해본 적은 없었다. 그가 본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 너머의 보이지 않는 무엇이었다.

―「길 1」, 242면

 

영감, 그 좋아하던 소주도 인자 싫소? 제우 한잔 묵고 마다요? 차라리 잘됐소. 맛난 것도 잊아불고, 좋던 것도 잊아불고, 그립던 것도 다 잊아불고, 올 때맹키 홀가분히 가씨요. 징헌 기억일랑 쩌 아지랭이맹키 날레불고 말이어라. 영감, 보이요? 민들레 꽃씨가 날리그만이라. 모르제라. 우리맨치 징헌 세월을 산 워떤 영감의 징헌 기억이 꽃가루로 날린가도 말이어라. 자요, 영감? 그리 자고 또 자요? 거그는 워떻소? 꿈도 없이 다디단 이녁의 잠 속은 워떤게라? 나도 잠 델꼬 가씨요. 나도 이녁이랑 한날 한시에 갈라요. 혼자된 딸년이 걸리기는 하제만 인자 다 컸응게 원도 한도 없소. 항꾼에 갑시다. 가설랑은 다시 안 올라요. 암만 존 시상을 준다개도 나는 싫어라. 이녁 각시로도 싫어라. 무정한 이녁이 싫어서는 아니고라. 이만허먼 됐소. 말로는 못해도라, 나는 알 것만 같그만이라. 생명이란 것의 애달븐 운멩을 말이어라. 헥멩도 뭣도 아니고라. 생명은 말이고라, 살아봉게 애달프요. 짠허고 애달프요

―「세월」, 319~20면

 

 

차례

 

봄빛

풍경

소멸

순정

양갱

스물셋, 마흔셋

운명

길1

길2

세월

 

해설

작가의 말

새로 쓴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추천사

 

마침내 근대 리얼리즘이 일상의 범속한 현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을 때, 현실의 묘사 혹은 재현의 중심에 섰던 소설은 그 자신이 비추어낸 역사나 인간이 생각 이상으로 초라하고 옹졸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 짐짓 놀라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장식적인 세련을 거부하고 장삼이사의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그들의 감각적 진실을 묘사하고 드러내면서 소설은 인간의 자기이해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젖혔다.

「봄빛」의 ‘뚜부’는 그 같은 근대소설의 근본적 책무를 새삼 돌아보게 하면서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단순한 모사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진실을 상상하는 절실하고 비범한 열정의 소산임을 다시 확인케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밥상을 둘러싼 언어들이 ‘고리대금업자 같은 세월의 수금’ 앞에 선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강퍅한 일생을 요약하는 강렬한 문학적 위엄에 어찌 닿을 수 있었으랴. 이것은 결단코 닥치는 대로의 현실에서 수집한 소박한 언어일 수가 없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봄빛』을 다시 읽으니 이유도 모른 채 내 기억에 각인된 어떤 장면들이 나를 소설의 길로 이끈 게 아닌가 싶다. 『봄빛』의 여기저기, 중요하지도 않게 툭 흩뿌려진 어떤 장면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저 홀로 생명을 얻고 쑥쑥 자라나 다른 단편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하나의 온전한 인물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중요한 에피소드로 등장한 이야기 여럿도 『봄빛』 속에 씨앗처럼 던져져 있었다. 그러니 내 소설은 우연히 맞닥뜨린 삶의 신비, 비의, 같은 것들을 해석해내려는 발버둥이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들을 오래 마음에 품었을 뿐, 스스로 자란 건 어떤 장면, 어떤 사람, 어떤 이야기였다.

장면이나 사람, 이야기를 품은 나는 그것들처럼 잘 자라지 못해 부족한 데가 많다. 『봄빛』을 다시 읽으며 여러 표현이 거슬렸다. 요즘의 인권의식이라면 감히 생각도 못했을 표현들이다. 고칠까 여러번 망설이다 그냥 두기로 했다. 등장인물들의 인권의식을 옹호한다는 의미는 결단코 아니다. 그저 그것이 그 시절이었고, 그 시절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어떤 인물들의 한계였다. 오늘의 우리는 누군가가 그 시절의 한계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견딜 수 없어 어떻게든 넘어서보려 치열하게 발버둥 친 결과로 만들어진 세상을 살고 있다. 그 시절의 도전과 한계까지를, 그 시절의 소설은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요즘처럼 책이 읽히지 않는 시기에 개정판을 낼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많은 분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사랑해준 결과일 것이다. 그 많은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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על המחבר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5·18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노근리평화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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