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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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의 시간 속에는 이 세상 헛되고 헛된 일 없다는 것을

아침마다 돌아오는 햇볕이 부연하고 있지 않는가”

 

모든 사라지는 존재에게 전하는 묵묵하고도 결연한 위로

생의 끝, 허무의 바닥에서도 끊임없이 자라나는 이야기

 

등단 이후 한결같은 시심(詩心)을 견지하며 슬픔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강직한 시세계를 다져온 박승민 시인의 네번째 시집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가 창비시선 508번으로 출간되었다. “생태 난민의 만가(輓歌)”(정지창, 해설)로서 절창을 보여준 『끝은 끝으로 이어진』(창비 2020)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신작 시집이다. 첫 시집에서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에 끈질기게 천착해온 시인은 이번에도 그 원숙한 사유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나아가 물질문명의 폐해와 인간의 폭력을 날카롭게 묘파하는 시편들은 생태 위기의 심각성과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운다. 신미나 시인은 “삶이라는 ‘반복’을 견디는 도저한 믿음에 바치는 격려”(추천사)라고 적었다. 삶과 시를 대하는 시인의 진실한 마음과 진지하면서 겸허한 태도가 깊이 와닿는 이번 시집은, 시인이 허무의 골짜기 위로 쌓아 올린 견고한 교량이자 생태의 회복을 간절히 염원하는 기도서이다.

 

“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

허무를 향한 깊은 응시가 길어낸 굳은 깨달음과 의지

 

박승민 시인은 죽음의 문제에 유독 관심이 깊다. 시인에게 죽음은 단지 인간의 문제가 아니다. 만물은 짧은 순간만을 존재하다가 사라지며 좌절과 실패는 필멸하는 존재들의 숙명이다. 시인의 노래는 그 허무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라짐은 무(無)의 시간 속으로 소멸하여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의 사슬로 이어져 다시 태어난다. 전작 시집에서 이미 “끝은 끝으로 이어진 세계의 연속”이며 “존재는 늘 새로운 형식으로 우주의 일부로 다시 드러난다”(「끝은 끝으로 이어진」)는 통찰을 보여주었듯,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죽음은 단지 삶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깨달음을 되새긴다. 시인에게 죽음이란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것이면서 “새로운 형태가 되는”(「하여간, 어디에선가」) 것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더욱 깊고 견고해졌다.

 

“인간의 눈을 포기할 때

세계는 얼마나 광활한가

위험보다는 위대함에 가까운가”

 

시인은 예민한 시선으로 물질문명의 폐해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주시한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사물의 눈으로 “자연이라는 순환의 고리에 뚫린 커다란 허방”과 “구(球) 안에 갇힌 세상”(추천사)의 살풍경을 직시하면서 “이 산의 심장과 저 산의 식도를 뚫어 직선 터널을 놓고부터”(「길」) 발생된 생태계의 변화를 이미 감지해낸다. “맨드라미 씨 같은 날벌레들”과 “까마귀만 한 붉은 나방들”(「어느 마을을 지나는데」)이 출몰하고, “강물과 산자락은 생산 라인으로 끌려 들어”(「새로운 신(神)」)가고, 돼지와 닭과 오리와 소를 떼로 파묻었던 자리에는 급기야 “인간들이 묻히기 시작”(「매장」)한다. 시인은 “인간이 전기톱을 끌 때”(「소멸의 집」)만이 비로소 폐허화된 땅에 “새순을 일으키는 따스운 봄의 홍조”(「틀니」)가 생기롭게 흘러들 것임을 예고한다.

“자꾸 오작동하는 몸”으로 “가망 없는 생”을 살아가다보면 문득 “살고 있다는 생각도 살았다는 기억도 희미”(「이동하는, 끝없는」)해진다. 더 나은 세상을 이루고자 한때 혁명을 꿈꾸었으나 “혁명은 이제 책 속에나 있고”, 절망과 고통의 세월을 버텨나갈 “견딜힘이 달리니” “이젠 남들처럼 살아보면 안 될까”(「입춘」)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밥그릇 속에 네명의 죽음을 꿰매버린” “자본의 강철 같은 맨얼굴”(「만이천오백칠십팔일」)도 똑똑히 기억해둔다. 그런가 하면 “아우슈비츠의 자식들”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하며 “아우슈비츠가 또다른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를 만드는 아이러니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자본주의의 폭력을 증언하고, 전쟁과 기후 위기와 기아 등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재앙의 현장을 기록해나가며 고통을 함께하고자 한다.

 

슬픔과 원망의 바다를 건너

끝내 돌아올 아침으로 향하는 굳건한 발걸음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항복연립」)라는 물음은 더이상 해를 볼 수 없는 현실을 사는 이가 던지는 무기력한 탄식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것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슬픈 기형”(「구절, 초가 하루에도 몇 번씩」)의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이가 던지는 낮은 비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물음에는 한줌의 믿음 역시 남아 있다. 당장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어디선가는 해 뜨는 아침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란 굳건한 믿음이다. 죽음마저도 생을 완전한 허무에 가둘 수 없듯 “먼 우주의 시간 속에는 이 세상 헛되고 헛된 일 없다는”(「헛됨이 오만년이라면」) 깨달음을 손에 쥐고 시인은 허망한 세상을 통과한다. 그렇게 “난폭한 광야”를 지나 “슬픔과 원망의 바다”를 건너 마침내는 “오래된 지혜의 이삭들”(「헛됨이 오만년이라면」)이 희망의 빛으로 반짝이는 상생과 조화의 숲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숲 그늘 아래서 시인은 견실한 시정신을 벼리어 ‘좋은 시’를 넘어서서 이 시대에 ‘필요한 시’를 꾸준히 써나갈 것이다.

 

차례

 

제1부

고무나무가 자라는 여름

하여간, 어디에선가

헛됨이 오만년이라면

상자에 던져진 눈

분노 뒤에 오는 것

밀양 과수원 길

마호가니 연립주택

어항

광장의 뱃노래

나의 게토는

두 손

아우슈비츠

이동하는, 끝없는

부활하는 접시

 

제2부

수박밭

매장

약줄

응시

적도 부근

새로운 신(神)

만이천오백칠십팔일

그늘을 깨밭에 가두고

너의 시대

항복연립

주술사

고산식물 인간

가까워질수록 까마득한

미래 농업

지나가버린 사람

 

제3부

자꾸 자라나는 이야기

담배꽃

순수한 인간

아주 긴 나팔꽃처럼

코로나 검사소

연(蓮) 봉오리

숲의 전구

지브롤터해협

소멸의 집

등꽃

눈과 눈들

꽃의 시작

사과 꼭지는 멈춘다

금강소나무

낙타

옥수수와 피라미드

 

제4부

다시, 붉은

젖은 가을에 이른 추위가 오니

틀니

멈추다

산소통

구절, 초가 하루에도 몇번씩

올리브나무 그늘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한국문학의 야생

빛나는 졸업식

낙원

입춘

전범(戰犯)

두 바퀴만으로

 

해설|정지창

시인의 말

 

책 속으로

 

안녕,

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

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

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

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

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

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

새로운 형태가 되는 거야

꼭 ‘인간’만 되라는 법이 어디에 있니?

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

우리는 ‘그 무엇’과 왈칵 붙어버릴 테니깐

난 우주의 초록빛 파장으로 번지는 게 다음 행선지야

―「하여간, 어디에선가」 전문

 

콘크리트 더미에서 나온 작은 손이 거칠거칠한 큰 손을 잡고 있다

 

이미 죽어버린 손이 그 손을 놓으면 아빠도 따라 죽어버릴까봐 못 놓고 있다

 

손을 놓는 순간 죽은 딸이 진짜 죽어버릴까봐 한순간도 딴 곳을 못 본다

 

(…)

 

눈은 텅 비어서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다

 

식어가는 큰 손이 식어버린 작은 손을 더는 식지 않게 덮고 있다

 

식어버린 작은 손이 식어가는 큰 손을 더는 식지 않게 꼭 덮고 있다

 

두 손은 떼어낼 수 없어서 무너진 시간 속에 멈춰 있다

―「두 손」 부분

 

죽음과 안 죽음 사이, 죽음과 안 죽어짐 사이, 죽음을 죽은 채로도 보고 산 채로도 보는 사이 만이천오백칠십팔일, 추방과 방치 사이, 노동과 반노동 사이, 구조조정과 노동 해체 사이, 정권 교체와 촛불 사이, 정부는 없고 자본만 남는 사이, 자본 밑으로 노조가 기어간 사이 만이천오백칠십팔일, 인간 불가능과 인간 가능 사이 만이천오백칠십팔일, 위장을 들어내고 위 속에, 밥그릇 속에 네명의 죽음을 꿰매버린 오, 전무후무한 세계노동사여, 자본의 강철 같은 맨얼굴이여, 인간 자본이여, 자본 인간이 밀어낸 인간 추방사여

―「만이천오백칠십팔일」 부분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시간의 단층과 그곳에서 살다 간 수많은 마음의 발자국과 그 위로 흘렀을 구름의 자손까지를 한 족보로 엮어서 보는 일

밤바람에 쓸려 가는 숲의 비명을 묵시(默示)처럼 듣는 일

 

인간의 눈을 포기할 때

세계는 얼마나 광활한가

위험보다는 위대함에 가까운가

―「코로나 검사소」 부분

 

맨드라미 씨 같은 날벌레들이 까맣게 몰려왔다

깔따구 같기도 아니기도 한 것이 팔랑개비처럼 머리 위를 돌면서 자꾸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직 흰자위를 떠먹기 위해 태어난 스푼처럼

 

수상한 것은

거머리 모양에 잠자리 날개를 단 곤충인데 이번에는 귓구멍만 노렸다 질 좋은 아미노산은 귓구멍뿐이라는 듯 달팽이관을 들락거리며 귀지와 연한 살을 갉아 먹었다

 

마을회관에서는

코뿔소처럼 생긴 투구벌레가 유리창과 방충망을 뜯고 있었다 유리창은 이상한 부적 문양으로 깎여나갔고 까마귀만 한 붉은 나방들이 논바닥을 닮은 장판에 까맣게 내려앉았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부분

 

혁명은 이제 책 속에나 있고, 혁명이 된 중국이나 러시아를 보면 결국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데, 이젠 남들처럼 살아보면 안 될까 일하다 기계에 끼여 죽은 노동자가 한두명도 아니고 세월호 유족은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청와대 앞에서 노숙 중인데, 이런저런 것 덜 보면서 정치색과 상관없이 사람들과 웃으며 차도 마시고 혈압 관리도 하면서 살면 어떨까 코스피가 삼천을 넘고 서울 아파트 전세가 몇억씩 간다는데, 이 채널 저 채널로 트로트도 따라 부르며 그리 살면 마음이 좀 평평하지 않을까 아픈 일은 끝이 없고, 옳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굳이 옳은 것도 아니었는데, 죽은 사람들한테만 미안하게 됐는데, 견딜힘이 달리니 이런 구멍도 짜내보는 것인데

―「입춘」 부분

 

추천사

누가 신이 벗어놓은 신발에 발을 넣었다. 그는 누구인가. “어느 날엔가 와본 듯”하고, “누군가와 살아본 듯”한 전생을 이미 지나온 주술사인가. 지구라는 외계에 불시착한 사제인가.

그는 꿀벌의 겹눈으로 구(球) 안에 갇힌 세상을 본다. “좀더 신선한 원인이 귀가할 때까지” 어둠을 좇는다. 오른눈에 “난폭한 광야”가, 왼눈에 “한낮의 사막”이 펼쳐진다. “자꾸 자라나는 이야기” 속에서 퇴장하는 농촌 풍경이, 욕망이 신이 된 자본의 “유전 지대”가 끝없이 이어진다.

박승민은 자연이라는 순환의 고리에 뚫린 커다란 허방을 본다. 거기에 ‘허무’의 반석을 한단씩 쌓는다. ‘노(勞)’와 ‘무(無)’로 쌓은 제방이다. 이로써 무엇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의 게송은 삶이라는 ‘반복’을 견디는 도저한 믿음에 바치는 격려이다. 그러니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냐고 묻는 당신에게 이렇게 화답하지 않겠는가. “먼 우주의 시간 속에는 이 세상 헛되고 헛된 일 없다는 것을 아침마다 돌아오는 햇볕이 부연하고 있지 않”느냐고.

신미나 시인

 

시인의 말

회오리가 빠져나간 뒤

안 보이는 곳으로 방치된 산산 파편들

그 깨진 살점들을 살피는 일

그 뼛조각들을 모아

다시 언어의 옷을 입히는 일

그건 아직 시의 영역

2024년 8월

박승민


About the author

박승민(朴勝民) 시인은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 등이 있다. 박영근작품상, 가톨릭문학상 신인상, 작가정신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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