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하나 굴려서 받는 대가로는 차고 넘치는 거 아니니?” 아픈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해인에게 태성 그룹의 며느리 자리가 제안 들어온다. 출신도 배경도 보지 않는 그 자리의 주인이 할 일은 태성 그룹 박 회장의 큰 손자 정수현과 결혼해서 임신하는 것. 직계 가족이 여럿 죽은 박 회장이 자손에 특히 집착하기 때문이었다. 해인은 궁지에 몰려 제안을 수락하지만, 결혼 상대자이자 같은 대학교 선배인 정수현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너 이 집에서 죽어 나간 사람이 몇인지 알아?” 수현의 밤색 눈이 짙어졌다. 그 시절보다 더 위태로운 눈빛이 해인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흐르면 고통도 옅어진다지만, 이 사람이 가슴에 묻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조금도 괜찮아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 이제… 부부가… 될 테니까, 같은 처지인 사람들끼리….” 해인의 말에, 턱을 쥔 수현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순간 숨이 넘어갈 거 같아서, 해인은 더듬더듬 내뱉던 말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작정했구나?” 고요하게 가라앉은 해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수현이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버텨봐.”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를 움켜쥔 순간, 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