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언젠가, 지금은 이혼한 전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함께 집을 나왔을 때, 터미널 딱딱한 나무 의자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던 그 기약 없는 절망의 순간에도 엄마를 위로해주던 이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우빈이었다. 중증의 알코올중독을 앓던 제 아빠가 홧김에 내던진 술병에 맞아 이마 전체가 피범벅이 된 우빈이 말을 건넸다. 흐르는 피를 휴지로 틀어막으며, 어서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길 보이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던 그때, 우빈이 했던 말이 있다. 지금도 지수에겐 그 말이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
‘엄마, 울지 마. 내가 있잖아.’
‘내가 있잖아.’
(/ pp.87~88)
세영의 몸도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순간 세영은 살아야 한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의 그림 속엔 희미하지만 함께 모였던 가족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세영의 현실을 압도하는 건 믿을 수 없는 공포, 자신의 무너져 내린 몸 위로 끝없이 쏟아지는 박스들, 모든 집기들이었다. 세영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곤 신에게 기도했다.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기도, 아주 어렸을 적 지금은 볼 수 없는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은 단 하나의 기도를 시작했다.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자비를.’
(/ p.153)
다른 이들, 두 동강 난 대교 위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믿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뒤집혀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서울의 참변을 인정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조용한 세상을.
(/ p.155)
믿을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그의 시야를 압도했다. …(중략)… 그러므로 그는 이제 마음 놓고 이 20층을 저주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이곳은 비현실 속 지옥이 아니므로. 현실이 곧 지옥이므로.
(/ pp.164~165)
윤정우의 진심은 무엇일까. 현수는 정말 알고 싶었다. 세상이 무너진 뒤에야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진심에 대해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 pp.228~229)
그렇지만 세영은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아빠’, ‘새엄마’, ‘우빈’, 그리고 ‘할아버지’ 단축 다이얼 1, 2, 3, 4.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가물가물했다. 세영은 010만 누르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런 세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미워만 하고, 자신의 신세를 망친 거추장한 걸림돌로만 생각했던 사람들, 가족이란 이름으로 모인 그들, 지금 세영은 그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한 번도 외우려 하지 않았으니까. 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 p.248)
그날 세영은 처음으로 두발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뒤에서는 현수가 받쳐주었다. 세영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아빠, 놓으면 안 돼. 놓으면 안 된다고.”
“걱정 마. 아빠가 붙잡아줄게.”
“놓으면 안 돼…… 진짜 놓으면 안 돼.”
“아빠가 보고 있으니까 괜찮아.”
“놓으면…….”
“괜찮아.”
“…….”
“괜찮아, 세영아.”
세영이 불안해할 때마다 현수는 아빠란 말을 힘주어 들려주었다. 아빠가 붙잡아 주고, 아빠가 보고 있기에, 그랬기에 세영은 두발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돌릴 수 있었다. 뒤에서 늘 든든한 아빠가 자신을 지켜주었기에, 그랬기에 조심스럽지만 용기 있게 세영의 두발 자전거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금의 세영처럼.
세영은 휴대폰을 귀에다 대고 계속해서 나지막하게 아빠를 부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희미한 빛살이 점점 더 강렬해지는 곳으로.
“아빠.”
“아빠.”
(/ pp.267~268)
울지 않았다. 울음이 나지 않았다. 현수는 오히려 기뻤다. 신비롭기만 한 충만한 희열이 현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우린 살아날 것이다. 모두 살아서 만날 것이다. 내일이 있기에.
비로소 현수는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게 되었다. 새삼 떠올린 그날이 바로 내일이다. 내일, 우리 가족 모두가 모일 것이다. 모여서 서로가 살아 있음을,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기뻐할 것이다. 더 이상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아파하지도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살아 있는 가족을 보는 것만으로,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것이다. 그게 가족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보고만 있어도 기쁜 게 가족이니까. 가족이니까. 현수는 어떻게든 내려가야 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중략)… 현수는 이제 내려가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 되었다. 위가 아닌 밑, 모두가 우러러보는 세상이 아닌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 pp.269~270)
현수는 더 이상 지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도 당분간 유예하고 싶었다. 앞으로,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약속하고 싶었다. 현수는 마지막 한마디만 하고 싶었다. 그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을 믿고 따라온 사랑하는 지수에 대한,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약속이고 다짐이었다.
“우리 매년 오늘이 되면 이곳에 오자.”
“…….”
“당신과 나, 아버지, 세영이와 우빈이. 우리 해마다 오늘이 되면 이곳에 오자. 알았지?”
“알았어.”
“알겠지? 약속했다? 약속한 거야.”
“알았어. 약속할게.”
현수가 지수를 끌어안았다. 지수의 가슴 속에서 벅찬 슬픔이 밀려들었다. 서글프거나 불행을 느끼는 슬픔이 아닌, 참된 기쁨으로부터 비롯된 슬픔이었다. 그래서일까. 지수는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 p.282)
주원규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총회신학 연구원 신대원 과정(M.Div)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제14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열외인종 잔혹사』, 『천하무적 불량야구단』, 『광신자들』, 『아지트』, 『망루』 등을 비롯해 평론집 『성역과 바벨』, 『민중도 때론 악할 수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