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삶, 존재 없는 존재들의 낮은 목소리
다채롭고 찬란한 색들로 채워진 세상을 꿈꾼다
2002년 계간 『시평』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노동 현장과 소외된 삶의 풍경을 그려온 김사이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가 출간되었다. 노동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첫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 2008) 이후 꼭 10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변화된 노동 환경의 그늘진 이면과 차별받는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반성과 비판과 연대의 공통적 행로를 모색”하면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운 현실을 “더 절실하게 겪어낸 날들의 기록”(서영인, 해설)이기도 한 진솔한 발언들이 공감을 일으킨다.
시인은 남성 중심의 기득권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삶의 고통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과 혐오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사회에서 시인은 “오늘은 내 여자씨가 무사하기를”(「너의 오랜 습관인 나」) 바라며 살아간다. 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남근의 연대” 속에서 “여자씨에게 노동의 댓가는 그저 살아 있는 목숨”(「교양의 나라」)일 뿐이고, 여성의 노동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내 죄는 무엇일까」)는 것으로 폄하된다. 이 세계에 저항하는 방법은 “글러먹은 생에 대한 저항”으로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는 것”뿐. 그러나 시인은 “나는 누구의 무엇의 부제가 아니라 나였어야 했다”(「저항의 방식」)는 자각에 이른다. 그것이 시인에게는 “절망으로도 살아야 하는 이유”(「사랑」)이다.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듯 노동이 첨단의 이미지로 포장되는 ‘지금-여기’에서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며 ‘노동의 소외’라는 또다른 현실을 직시한다. “다치거나 죽어도 산재보험은 꿈도 못 꾸”는 세상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는 어디쯤인지”(「세상 밖으로 우수수」) 가늠할 수조차 없다. “비극으로 끝날 한편의 삶” 속에서 시인은 “위태로운 내 밥그릇 슬그머니 움켜”(「공포 영화」)쥐는 비애감에 젖어들며, “생식기도 심장도 사라진 자본형 인간으로 진화 중”(「잠 못 드는 밤」)인 황폐한 세상에 “공포가 터져 불꽃같은 반란이 솟구치기를”(「묻지 마 따지지 마」) 꿈꾼다.
그런데 가난에도 계급이 있고 노동에도 계급이 있다. 심지어 “죽음도 계급적이다”(「교양의 나라」). 내일의 희망보다 오늘의 생존이 더 급해서, “네가 죽어도 일을 해야 해서/누가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해서”(「내 죄는 무엇일까」), 부정한 권력을 끌어내리고 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한 저 위대한 ‘광장’에서도 소외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국경 안에서 국경을 넘어서서 부유하는 영혼들”과 “변방으로 변방으로 시대를 건너가는/원주민도 이주민도 벗은 제3의 사람들”(「행렬」)이 있다. 시인은 이들 이주민 노동자를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소수자로 껴안으며 연대 의식을 느낀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고달픈 삶일진대 “공생(共生)하자며 공사(共死)로” 가는 “쓰레기 같은 정치”(「공범」)가 판치는 속에서 시인은 “색이 다르고 성이 다른 것을 차이라 말하고 차별하지 않는”(「사랑」) 세상이 오기를 꿈꾼다. “다채롭고 찬란한 색들로 채워진 선물 같은 세상”(「아득한 내일에게」), “자연의 빛과 인간의 빛이 한 몸으로 어우러”(「빛의 그늘 속에서」)진 그곳을 향하는 그의 시는 이제 “최후의 저항”(백무산, 추천사)으로서 다시금 노동하는 삶의 땀과 눈물과 사랑으로 자아낸 희망의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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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낳고 젖을 주고 흙을 다지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따닥따닥 붙은 콜센터에서 상냥하게 친절하게
보이지 않아도 웃고 보이지 않아도 참아서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
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
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는다만
여자의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나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내 죄는 무엇일까」 중에서
가난은 태생이 계급적이어서
자발적 가난이란 없다
가난은 민주주의의 발바닥
(…)
밥은 빼앗는 것이 아니다
밥은 나누는 것이다
「밥」 중에서
구로공단역을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꾸더니
가리봉역을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꿨다
구로, 공단, 가리봉 이 거리에
이십여년 내 삶의 흔적이 지워졌다
성장통이 담긴 내 청춘의 시들이
정처가 없어 헤맨다
(…)
불편한 역사를 콘크리트로 발라 덮는다고
뒷골목 노동이 사라질까
「탈 탈」 중에서
인간의 피는 색이 없었을 것이다
지구가 태어나면서 돌고 돌아
서로의 고통 속으로 스며들어 빚어낸 오색 빛깔
다채롭고 찬란한 색들로 채워진 선물 같은 세상
오리라는 상상 너머의 상상을 한다
「아득한 내일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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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문을 열고 밖을 나가본다.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다. 다시 나가본다. 그러나 그곳은 안이다. 다시 나가보지만 관 속이다. 밀폐된 세상은 밖이 안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어떠한 장소도 차지할 수 없다. 상처는 삶을 삼켜버렸고, 푸른 초원조차 피비린내로 덮여버렸다. 어떡할 것인가? 시인은 그곳에서도 가족을 돌보고 출근을 하고 시를 쓴다. 불안과 아귀다툼과 농약병도 그에게는 통속적이다. 이 정도는 아직 절망이 아니다. 시인의 절망은 저항 불가능성에 있다. 자본뿐 아니라 “노동에게 희롱당하”는 현실, 인체 그 자체에 대한 착취를 당하고 불안만이 무사한 삶이건만 “생식기도 심장도 사라”져버려 저항조차 불가능하다.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개인이 떠안을 일이 아니건만, 시인은 저항의 힘에도 희망을 걸 수 없는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나 깊고 긴 늪을 건너온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민감하고 쉽게 무너지고 상처 입고 길을 잃는다. 이것이 시인에게는 최후의 저항이다. 절망은 그를 단련시켰고, 정치적 연대가 아닌 내면의 연대를 꿈꾸게 했다. 저 촛불광장에서 시인은 정치적 힘이 아니라 “자연의 빛”을 발견했듯이, 그의 시는 이제 절망의 바닥에서 일어난 내면의 빛을 품고 아비규환의 세상으로 나아가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백무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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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시가 여전히 길다
덜 성숙하니
일상에서 내 말보다 시가 더 길다
아직 할 말이 많은가보다
아직 반성할 기회가 있는 것이겠다
아직 길은 있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아직 산다
여전히 나는 네가 좋다
음정 박자 어설픈 내 옆에 있어서
2018년 12월
김사이
[목차]
제1부 지독하게 살았으나
거리에서
고시원, 아름다운 날들
내 죄는 무엇일까
예감
너의 오랜 습관인 나
성실한 앨리스
보통 날들
사랑하니까
보온도시락통
동시성에 대하여
행렬
아무도 없었다
균열
교양의 나라
저항의 방식
제2부 나는 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랑
생각도 습관이 된다
세상 밖으로 우수수
나를 사주실래요?
밥
하루치 끼니
신호
공포 영화
탈 탈
잠 못 드는 밤
보고 싶구나
나는 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여기
묻지 마 따지지 마
제3부 떨림도 그리움도 버린
병문안
새벽
가끔은 기쁨
도둑년
꽃반지
단풍
오래전 그날
틀니
이부자리
골목의 노래
너에게로 가다
바람
춤추는 어머니
제4부 다시 반성을 하며
편향
기억
솔직한 위선
공범
그대에게
풍경
어떤 인사
커피 마시는 개
어느 늦은 밤
연대
화끈한 반항
아득한 내일에게
빛의 그늘 속에서
다시 반성을 하며
다시, 다시, 또
해설|서영인
시인의 말
Changbi Publishers
김사이
1971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공부를 했다. 2002년 『시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