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 원작소설
품격 있는 파격, 모두를 사로잡은 로맨스 스릴러!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사랑과 폭력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서
김려령이 드러낸 결혼과 사랑의 맨얼굴
개성 넘치는 문체와 폭 넓은 사유로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등의 작품을 통해 우리 삶의 기저에 가닿는 깊이 있는 서사를 구축해온 김려령의 장편소설 『트렁크』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으로 출간되었다.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트렁크』는 미국 영국 중국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등 여러 언어로 번역 수출되었고, 동명의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2024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활력’ ‘비범한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김려령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강한 흡인력과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트렁크』는 ‘배우자 임대 서비스’라는 도발적인 설정에서 출발한다. 김려령은 생동감 넘치는 대화와 질주하듯 뻗어나가는 문장으로 ‘기간제 아내’인 주인공의 결혼생활을 생생하게 그리며 사랑과 결혼, 인간관계의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 삶을 옥죄는 사회의 ‘정상성’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파격적인 로맨스 서사와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식 전개는 놀라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제도와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폭력을 신랄하게 꼬집으며 세계를 색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새롭게 발간되는 리마스터판에서는 이처럼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에 질문하고 완고한 정답에 균열을 내는 작품의 매력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표현과 대화를 한층 정교하고 다부지게 다듬었다. 아울러 인물들 간의 비밀스러운 서사가 더욱 탄력을 받게끔 섬세한 맥락을 추가해 새단장을 마쳤다.
서른살, 다섯 개의 결혼반지
‘이번 결혼에도 사랑은 하지 않았습니다’
올해 스물아홉살의 주인공 ‘인지’는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비밀 자회사인 NM(new marriage) VIP팀에서 입사 육년차 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미혼 남녀의 결혼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것과 달리 인지는 직접 VIP회원의 기간제 부인인 FW(field wife)가 되어주는 업무를 맡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 면접에서 떨어진 날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입사 제의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인지는 NM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대학시절,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애자였다는 이유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고 결국 떠나게 만든 어머니에 대한 반감과 취업의 어려움으로 망명하듯 NM에 입사한다.
네번째 결혼을 마친 인지는 전남편으로부터 재결합 신청을 받고 다섯번째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종전의 결혼생활에 비해 순탄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인지 앞에 ‘엄태성’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절친한 친구인 ‘시정’의 부탁으로 휴가기간 중 한번 소개팅을 가졌을 뿐인데, 엄태성은 자신을 단칼에 거절한 인지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호기심을 품고 스토킹을 시작한다. NM보안팀은 인지가 계약 남편과 함께 사는 집까지 집요하게 찾아온 엄태성을 제압한 뒤 인지 몰래 격리시킨다. 이후 그의 행방이 궁금해진 인지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불법으로 납치되어 학대받고 있던 그를 풀어주는데……
폭력과 부조리로 가득한 삶
그럼에도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트렁크』는 결혼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여러 관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온 김려령 문학의 중요한 성취다. 작품은 결혼과 사랑의 현실을 들여다보며 그 형식과 내용을 꼬집고 비틀고 속살을 들춰낸다. 계약결혼, 성소수자 등의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사회적 규범의 이면을 바라보면서 관습이 얼마나 고루한 것인지 증명한다. 규범을 전복하려는 이러한 시선을 ‘비딱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딱한 시선은 이미 비딱해진 세계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청년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삶과 사랑에 ‘보편’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얼마나 야만적인 올가미가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인과로는 설명되지 않는, 횡액과도 같은 인물 엄태성은 그러한 세계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단 엄태성뿐 아니라 주인공 인지를 둘러싼 위태로운 상황과 사연 많은 인물 들은 폭력의 문제를 또렷이 형상화한다. 타인의 삶에 무책임한 호기심을 갖고 개입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나아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의 삶에 간섭하고 영향력을 끼치려는 욕망이 결국 삶을 그르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사랑’의 어두운 이면인 것이다. 그럼에도 김려령은 “이런 사랑, 모두 꺼내어 볕에 널고 싶다”고 말한다. 응달진 마음 한구석에서도 한송이 꽃처럼 피어날 사랑을 응원한다. 결국 다시 사랑에 서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끌어안으며 연민한다.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는 사랑처럼.
작품 속 트렁크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파란만장한 다섯번의 결혼생활을 거쳐온 누군가의 청춘 그 자체이기도 하고,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극단의 도피처이기도 하며, 또 원하지 않는 현실에 안주하려던 나약한 마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김려령의 트렁크 안에 담긴 것은 보편이라는 얄팍한 범주에 속박되고 싶지 않다는 자유로운 결단과 예리한 통찰, 무엇보다도 포근한 사랑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자신의 청춘을 담은 트렁크 하나쯤 있을 것이다. 김려령은 묻는다. 당신의 트렁크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당신은 행복합니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당신의 트렁크의 견고한 자물쇠를 풀어줄 작품으로, 통념을 거스르는 신선하고 통쾌한 작품으로 김려령의 『트렁크』를 지금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소개하는 이유다.
차례
트렁크
새로 쓴 작가의 말
작가의 말
책 속에서
“결혼 괜찮았어?”
“생각보다. 당신은?”
“나도.”
그렇구나. 서로 괜찮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나.(10면)
한번쯤 결혼해보고 싶은 여자. 그녀는 내가 그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자금을 지불하는 NM 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28면)
“여자들 주머니가 당신 현금지급기냐고.”
“뭐라고요?”
“꺼지라고, 개새끼야.”
엄태성이 순간 당황했으나 곧 피식 웃었다. 사기꾼 새끼. 웃어? 나는 마시던 커피를 들고 일어났다.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으니 더는 접근하지 않겠지. 정리대로 가서 커피를 버리고 카페를 나왔다. 엄태성은 변명을 하지 않았고, 따라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뒤통수에 엄태성의 쿡쿡대는 웃음이 달라붙는 것만 같다. 왜 이렇게 개운치 않을까.(47면)
“어, 사기꾼. 나 사기꾼 아니에요. 자꾸 가니까 돈이라도 노린 줄 알았나봐요? 아니지. 나는 그게 궁금한 거야. 그러니까, 사람을 왜 그렇게 싫어해요? 내가 왜 싫어요? 내가 뭘 했는데?”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처음 내 몸이 감지했던 두려움을 이제 알 것 같다. 자기 자장 속에 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저 막을 뚫지 못한다. 나의 심각한 거절이 그에게 먹히지 않는 이유다.(73면)
백이면 백만큼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일일이 캐묻고 싶지 않다. 다 이유가 있겠지. 취직하는 데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밝혀야 하나. 그런 건 자기소개서에나 쓰면 될 일이다. 성스럽거나 천박한 이유 따위는 없다. 이유가 성스러우면 격이 달라지나. 유대리가 마음에 드는 이유다. 충분히 구구절절한 삶이었음에도, 그런 거 말해서 뭐해요, 하고 그냥 웃었다. (…) 자신의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다.(85면)
내게는 한없이 예쁜 사람이, 어머니에게는 왜 그토록 더러웠을까. 내가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 대신 사과는 해야 한다. 미안해요. 어머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그렇게 자라 그래야 하는 줄 안다. 같거나 비슷한 모습의 사랑,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NM은 분명 기이했지만, 당시에는 내가 어머니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이었다.(89면)
“돈하고 사랑은 똑같애. 없어도 지랄 많아도 지랄이야. 한 백명 만나면 든든할 것 같지? 하나 깊이 만난 것보다 더 헛헛해. 적당히 만나고 길게 사랑해라. 자꾸 갈아치운다고 더 좋은 놈 안 나타나. 총천연색이 한가지 색보다 선명하지 못한 법이다. 알아듣냐? 나는 왜 너만 보면 불안불안한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조금 더 술을 마셨고, 나는 조금 더 울었다.(99~100면)
그래도 서연은 아직 이 남자를 사랑한다. 늘 설레는 여자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할 틈 없이 FW로 막으려는 실수를 범했다. 사랑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찰나다. 긴긴 정도 단숨에 무너뜨릴 만큼 위력적이다. 물론 그런 위력이 내게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일말의 가능성. 그러나 서연은 그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안해하고 있다.(136면)
그때 혜영의 사진첩을 보았다. 고등학교 때 사진부터 한장 한장 넘기다가, 문득 거기에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없다.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은 물론 내가 낀 반 단체사진조차 없었다. 한참 친할 때 내가 만들어준 제본 앨범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유를 묻지 못했다. 죽어버렸으니까. 사진으로 살해당한 기분이었다.(144면)
숨 쉴 때마다 찬 기운이 내장까지 스미는 것 같았다. 그래도 차 냄새 지독한 사무실에 남는 것보다 나았다. 택시에서 내린 곳에 서서 소담농원을 보았다. 저 예쁜 문 뒤에서 그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너무 깊게 들어갔다. 예쁜 문만 봤어야 했다.(157면)
“니들 나 모르게 미쳤던 거냐?”
“사랑이 원래 미치는 거야.”
“누가 누굴 사랑하는데?”
“혜영이가 날. 내가 널.”(190면)
볕 아래 맘껏 내놓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내놓으면 내놓은 대로 힘든 사랑이었다. 기어이 구석에 처박으려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런 사랑, 모두 꺼내어 볕에 널고 싶다. 누구라도 보송보송 잘 마른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사랑 때문에 우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196~97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남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자주 경계를 넘는다. 전보다는 조금 더 나를 신뢰하는 것 같다. 그러나 너무 깊은 신뢰는 상대를 잡아당겨 한쪽으로 묶는다. 동등한 위치 따위는 없다. 먹거나 먹힐 뿐이다.(208~9면)
“여보, 우리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땐 그냥 같이 살자.”(225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정 때문이 아니다. 내 직업에 대한 회의였다. 누가 내게, 당신의 이십대는 어땠나요? 물으면, 대답이 마땅치 않다. 트렁크. 여행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좋았겠어요. 글쎄요. 십대 때 원한 이십대가 아니었다. 벌써 서른이다. 삼십대를 마치며 또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내 삶을 꾸역꾸역 구겨 넣고 다녔던 트렁크를 버려야 한다.(232면)
선배가 떠난 것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거나, 어머니의 반대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늘 자신을 찾고 싶어 했다. 그 여정이 길어지고 있나보다. 소망한다. 언제라도 찾아와 이제 좀 알겠다고, 그때 그렇게 떠난 게 귀엽지 않았냐고, 웃는 얼굴로 말해주기를.(239~40면)
주변 사람들은 늘 내가 만나는 사람만 중요시했을 뿐, 행복하니? 하는 질문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당연 내 불행 따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요, 항변해도 소용없었다.(242면)
새로 쓴 작가의 말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보관해두었던 초판본을 꺼내 읽었습니다. 2015년. 꼭 9년 전이었습니다. 마치 9년 전에 담근 장의 항아리 뚜껑을 여는 기분이었습니다.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글이 익은 듯한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풋풋한 패기로 소설을 써서 책에 담았습니다. 여전히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첫 장을 펼쳤는데, 9년 숙성된 『트렁크』는 그때의 풋풋함과는 다른 농도의 결과 맛을 냈습니다. 이렇듯 소설의 맛이 새로워진 건 그간 세월의 풍속을 거치면서 공감과 해석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지요. 신간은 새 작품을 내는 것이라면, 개정판은 숙성된 작품을 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같은 작품을 발표함에도 떨림이 다른 이유입니다. 모쪼록 독자분들게 읽는 맛이 좋은 소설이었으면 합니다
2024년 가을
김려령
김려령(金呂玲)은 2007년 『완득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백』 『너를 봤어』 『트렁크』 『일주일』 『모두의 연수』, 소설집 『샹들리에』 『기술자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