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미지로 사용된 편지는 미국의 록그룹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이 남긴 자필 유서다. 강렬한 파란색과 빨간색 표지를 넘기면, "이제부터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보자"는 작가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소설 속엔 온통 죽음뿐이며 그 죽음은 격렬한 고통이나 회한이 따르지 않는 무채색의 죽음이다(이 죽음은, 당연히 ''물리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으되, 죽어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마치 여름 밤, 달리는 차창에 부딪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벌레들의 사체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표제작인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에는 인기탤런트 ''장미''와 그녀를 좇아다니는 스토커가 등장하며, 1인칭과 3인칭의 두 개의 이야기가 겹쳐지며 진행된다. 우선 1인칭의 이야기.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장미. 남자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한다. 남자는 장미가 흘리고 간 휴대전화를 줍게 되고, 그녀와 만날 약속을 한다. 다음, 3인칭 이야기. 또 다른 남자 역시 비행기 안에서 ''장미''를 만난다. 그녀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었으며 남자는 사진작가였다. 빼어난 용모 덕택에 그녀를 일약 톱스타로 발돋움하게 되고, 옛 애인이었던 사진작가는 그녀에게 버림받는다. 다른 강물처럼 흐르던 두 이야기는 마지막에 하나로 합쳐지는데, 남자는 장미를 납치해서 다시 시작하자며 애원하고 장미는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며 울부짖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작가가(주인공이) 인용한 기형도의 「포도밭 묘지」(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을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는 그래서 다 암울하다. ''엽기적''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모자라지 않는 「만리장성 너머 붉은 여인숙」은 강간, 영아유기, 살해, 인육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들이 모여 있는 작품이다. 노파와 벙어리손녀가 운영하는 ''붉은 여인숙''에서 사내들은 매일 도박판을 벌이고, 벙어리 소녀는 그들에게 ''일상적인'' 강간을 당한다. 어느 날 소녀는 화장실에서 아이를 유산한 뒤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강물에 버리고, 한 사내는 밤늦은 시간 강물에 떠다니는 검은 비닐봉지를 주워 중국집 ''만리장성''에 넘긴다. 그리고 노름을 위해 모여있는 사내들은 만리장성에 주문한 자장면을 아주 맛있게 먹는다. 허구와 실제가 뒤섞인, 읽고 나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이 작품에 대해 평론가 김병익은 "30대 전반의 젊은 소설가 김경욱의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가 끝내 드러내고자 하는 이 세계에 대한 소감은 바로 레밍 게임이 함축하고 있는 ''자살하기 위해 살아남기''의 ''기막힌 아이러니''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믿을 것''을 요구하면서도 배신을 이야기하고 있고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내기''로 결정되도록 이끌며 ''행복해하면서도 불안''을 예감한다. 요컨대 그는 이 세상을 비관하고 삶의 의미에 허무해하며 그것의 사실성을 부정한다. 그렇다는 것을, 그는 리얼리즘으로 더 이상 추궁할 수 없는 사실의 모호성을 드러내는 탈사실주의적 수법으로 드러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정말 우리가 자살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